brunch
브런치북 교사 일기 17화

조종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시간

by 째비의 교사일기

독자님들은 조례와 종례 때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점심에 먹었던 메뉴가 고작 한 시간만 지나도 기억이 잘 안 나듯, 매일 있는 자연스러운 일은 기억이 잘 안 나는 듯합니다. 만약 기억이 잘 났다면 저도 참고를 잘했을 텐데요. 담임 1년 차 때는 조례 때 무엇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습니다. 매일 아침 학생들 앞에 서는 것조차 떨렸고, 학생들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습니다. 어디에 서있을지,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머리를 싸매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긴 2년 차부터 조례 때 꼭 했던 작지만 특별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 기억을 더듬어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중학교 2학년 전까지 총 7년, 방학을 제외하고 약 1400번가량의 조종례를 경험했습니다. 7년 내내 조종례 때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런 제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조례가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7분 동안 해주신 진심 어린 상담이 그 주인공입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조례 때만 되면 여분의 책상 하나와 의자 2개를 밖으로 빼셨습니다. 반 안에 있는 아이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앞문 가까이 책상을 두셨고, 저와 마주 앉아서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배치하셨습니다. 학기 초여서 그런지 선생님과 어색하기도 하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마주하고 대화한 적이 없었기에 긴장도 됐습니다. 선생님 손에는 종이 두장이 들려있었는데, '미'로 가득 찬 저의 생기부와 직전 기말고사 등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입이 떼어지기도 전부터 앞으로 나올 진부한 대화내용을 예측했습니다. 수학 말고는 잘하는 과목이 없다느니, 이제부터 학원을 다녀봐라느니 등, 공부에도 관심 없는 저를 닦달할 얘기들이 들려올게 뻔했습니다. 7년간의 조종례를 되짚어 봤을 땐 안 봐도 비디오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보여주신 비디오는 제가 못 본 비디오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측할 수조차 없는 반응으로 절 놀라게 만드셨습니다.


째비야 너 공부 한번 제대로 해 볼 생각 없니? 하면 되게 잘할 거 같은데?


난생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자 동기부여였습니다. 항상 반에서 잘해봐야 절반 안에 들까 말까 한 제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니.. 하면 잘할 거라니.. 의심부터 들었습니다. 흠칫 놀라는 제 모습을 보고는 포근한 미소로

"너 한번 쌤 믿고 중간고사까지 열심히 해봐. 넌 무조건 할 수 있는 아이다. 내가 장담하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속는 셈 치고 한번 이 악물고 해보고 싶었습니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믿어주고, 응원해 준 경험이 없었기에 정말로 열심히 해보고 싶었거든요.


공부 방법에 대해서 잘 몰랐기에 선생님께 공부하는 방법을 물어보았습니다. 복습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셔서, 오늘 배운 모든 과목들을 백팩과 에코백에 나눠 담았습니다. 집에 가서는 거실 책상에 책을 쌓아놓고 엄마가 보시던 전원일기를 백색소음 삼아서 열심히 복습했습니다. 혼자 하다가 막힌 부분은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가서 물어보거나, 쌤들을 찾아가 적극적으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책들을 이고 매일 등하교를 하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인류의 진화 역순처럼 몸이 변해갔습니다. 올곧았던 몸은 목은 거북목에, 허리는 바나나처럼 휘고, 오른쪽 어깨는 반쯤 내려앉았습니다. 점점 유인원에 가까워질 때쯤 중간고사가 다가왔습니다. 반에서 30명 중 18등이었던 저는 12등까지 6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기말고사 때는 욕심이 생겨서 복습 외에도 추가로 문제집을 사서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교 후에 집 가서 4-5시간씩 매일 공부한 결과 저는 기말고사 때는 반 7등을 하였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한껏 칭찬을 해주시며 성적 장학생으로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반에 들어갈 때마다 제 자랑을 해주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모여서 저는 2학기 기말 때 반 3등으로 올라갔고 전교에서 20등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마치 본인 성적이 오른 것처럼 기뻐해주시고, 고생 많았다고 안아주셨습니다. 어디 TV에서나 볼법한 드라마틱한 성적 변화는 아니지만, 이때 받았던 사랑과 관심은 제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전해주신 사랑과 관심이라는 씨앗은 제 마음속에 심어져 교사라는 꿈이 자라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꿈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이 교사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약한 빗줄기도 불빛 아래에선 강한 빗줄기처럼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만약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은사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아무도 제 존재를 몰랐을 약한 빗줄기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제게 비추어주신 따뜻한 불빛은 아무것도 아닌 저를 존재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제가 교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지침서가 되어주었습니다.


교사가 되어서 일 년 동안은 적응한다고 조례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전달 사항을 말하고, 지각생을 체크하고, 폰을 빨리 제출하라고 재촉하다 보면 시간이 다 지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2년 차부터는 여유가 조금 생기자마자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조례 들어가기 10분 전은 상담할 학생을 파악하기 좋은 골든 타임입니다. 학생이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읽고 제가 궁금한 부분에다가 밑줄을 긋거나 질문을 준비합니다. 반에 들어가서는 전달 사항을 빠르게 전달하고 남은 7분 정도는 학생을 불러내어 진지하게 상담에 임합니다. 잠깐의 시간이 학생의 인생을 바꿔줄 불빛이 될 수도 있기에 매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선생님께 받았던 사랑의 반의 반이라도 아이들에게 전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따뜻한 불빛이 되길 바라며 열심히 불을 밝히며 살아가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항상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keyword
이전 16화인기 없는 연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