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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우 Jul 23. 2020

유리와 율희

닮은 두 소설

복수라는 자해


유리와 율희. 이것은 각각 다른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발음이 같은 것처럼 두 소설의 내용과 방향도 비슷하다. 

이 소설들은 소년들은 나오지 않는 소녀들 만의 이야기다. 소녀들 만이 할 수 있는 질투와 폭력이 생산해 내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소설은 모두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가 과거 학창 시절의 사건을 회상하는 가운데 그 사건들이 결국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들이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소녀들의 질투는 소년들의 것들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그 무엇이 아닌 그 누군가를 독차지하거나 어떤 누군가들과 같은 편에 있기를 원하는 욕망이 유난히 강하다. 그래서 그녀들의 폭력도 주먹이 아닌 입을 통한 편 가르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적이지 않은 그것은 한 사람에게 평생 가지고 갈 상처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폭력자와 피 폭력자 공통의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조수경의 단편 ‘유리’에서는 

유난히 예쁘고 어쩐지 부유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는 유리는 학교에서도 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신비스러운 존재였다. 그녀의 엄마가 유명한 여배우라든가 의사 집안의 외동딸이라든가 하는 알 수 없는 소문들은 유리가 살고 있는 저택 같은 집의 규모에서 비롯되었다. 

‘명선’은 그런 신비스러운 유리가 자신과 일기를 교환할 정도로 절친한 친구라는 것에 스스로 감동하고 만족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처음으로 유리네 집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실은 유리는 그 큰집의 지하에 세 들어 사는 평범하게 가난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명선은 그 후로도 유리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유리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그때 이후부터 유리에 대한 어떤 상하관계 혹은 종속관계가 역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날 사건을 계기로 유리가 자신의 그런 법칙을 배반했다고 오해하면서 명선은 모든 친구들에게 유리의 실체를 밝혀 유리를 배신한다. 명선은 그것을 종속을 배반한 유리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년 후 작가가 된 명선은 우연히 유리와 만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리가 자신을 복수할 것이라는 혼자만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계하며 그녀는 오래전 자신이 만든 종속관계에서 아직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소현의 단편 ‘어제의 일들’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잃고 주차장 관리인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지체장애 여성 ‘상현’에게 옛 친구 ‘율희’가 찾아온다. 그리고 상현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한다. 상현은 율희의 얼굴조차 기억이 없지만 율희는 과거 어릴 때부터 상현을 따라다니던 친구였다. 상현은 예쁘고 바르며 똑똑했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의 선망이 되었고 선생님들에게도 바른 제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던 미술교사와의 오해로 빚어진 사건으로 상현의 절친들은 그녀들의 거짓 진술로 인해 상현을 배신했다 결국 미술교사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상현은 투신 자살 시도로 인해 정신장애인이 되어버렸다. 

주차장으로 율희가 찾아온 다음 날에는 그녀를 배신했던 당시 율희를 비롯한 절친들도 찾아와서 그녀에게 사죄한다. 기억이 없는 상현은 그때부터 조금씩 과거 기억을 찾아간다.  이야기는 상현이 기억을 찾으면서 이루어져 간다.

상현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미안하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유행인지 약속인지, 모두들 미안하다고, 자신들 때문에 내가 이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흔하디 흔한 말이 별로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렇다. 상현은 누군가들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자신만의 결정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도 누구 때문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만든 어두운 틀에 스스로 갇혀 죄인이 된 것이며 그 틀에 평생 갇히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마치 한 사람의 소설처럼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소녀들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거나 원하는 대로 되지 못했을 때에 느끼는 동물적인 불쾌와 질투는 폭력적인 복수로 표출되는데 결국 그 복수는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자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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