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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치료사의 자화상

물리치료사의 마음 이야기(의료기술의 역사와 발전)

 1800년대. 소화기학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 낸 외과 의사 윌리엄 버몬트. 그는 기존에 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소화가 기계적으로 일어난다는 이론에서 화학적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관점의 변화를 만들어내며 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단순히 해부학적 지식이 아니라 소화가 일어나는 생리학적 과정을 증명해냈다는 점에서 그 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이 발견에 크나큰 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청난 발견 속 발견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정의 잔혹성이었다.

 1830년대 알렉시스 세인트 마틴이라는 청년이 총에 맞는 사건이 있었다. 윌리엄 버몬트는 당시 외과 의사로서 이 청년의 주치의를 맡았는데,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위가 뚫린 상태에서도 생존하게 된다. 위에 얇은 막을 생성하며 생존하게 된 마틴. 그런 마틴에게 윌리엄 버몬트는 생각지도 못한 실험을 하게 된다. 바로 열린 위에 직접 음식물을 넣어보며 소화 과정을 지켜본 것이다. 이 과정이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마틴은 도망가려 했지만 본 실험에 엄청난 집착을 하고 있는 윌리엄 버몬트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행해진 처절한 과정 속에 결국 200번이 넘는 실험이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윌리엄 버몬트는 세계적 외과 의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는 생명 윤리와 연구 윤리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묵과하고 넘어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연구를 진행한 점, 실험 과정상의 문제가 있음에도 실험을 지속한 점 등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사건만 보더라도 의료기술의 발전은 추악한 민낯을 숨기고 있다. 지금을 사는 대부분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으나 세계 1, 2차 대전이 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의학사의 비극은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에게 많은 부분 씌워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나라를 제외하고도 많은 나라에서 전쟁의 승리라는 목적하에 이루어진 비윤리적 실험이 존재했다. 결국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의 단편적인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학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윤리 또한 그러하다. 많은 논쟁과 합의가 있었고 그 속에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 그 덕에 인체를 이용한 실험과 다양한 술기들이 인권 아래서 행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일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불합리함이 생명을 침범하는 사례는 과거에 비해 극히 미미하다 볼 수 있다. 허나 앞서 이야기한 가학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발전을 위한 희생은 분명 존재한다. 의료가 행해지는 지금 이 현장에서 말이다.     


 공공연하게 쓰이는 드라마 속 대사 중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의사는 자신이 죽인 환자의 수만큼 성장한다.”

 외과 의사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를 보셨다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듯하다. 언뜻 보면 멋진 대사처럼 보이나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죽인 환자의 가족이 자신이 된다고 가정해 보아라. 스스로가 의료진의 성장이라는 명목 하에 느껴지는 상실감과 분노를 억누를 수 있을까. 화를 잠재울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절대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응당 의사라는 직군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뿐더러 그런 상황에 처한 의료진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각 직역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보건 의료직에 해당하는 바 우리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나와 같은 치료사는 실패를 머금고 자란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의료기술의 단계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의료진 개인을 1의 노동력으로 보았을 때 현장에 얼마나 투입될 수 있는가가 계산되는 만큼 경험 없는 한 명의 치료사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환자를 보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발생한다. 부자연스러움을 알면서도 의료진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가려져 서로가 의연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많은 치료의 실패가 성장의 기틀로서 사용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셀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쳤고 스스로 크나큰 자괴감 속에 환자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고민과 고뇌에 빠져 숱한 밤을 지새웠다. 내게 맡겨진 환자가 누군가에겐 가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성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모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비효율적이라 말할 수도 있다. 성장은 실패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누구보다 빠르게 현장에 투입되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실패는 필연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연결점에 내가 있음을 허락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내가 미안함을 갖고 치료하지 않도록 각자가 노력해 나아갈 뿐이다. 시스템이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기에.     


 누구를 비난하는 글도, 시스템을 비판하는 글도 아니다. 단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안타까운 자기반성과 성찰이다. 환자를 다치지는 않게 하고 있다는 실력 없는 자신을 모른 척 위안 삼고 넘어가는 많은 시간 뒤에, 마음으로 품은 많은 후회가 지금의 나를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글의 서두에 이야기한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생명이든, 삶이든, 사람을 대하는 의료 전문가들의 자기반성이 있지 않으면 시대상을 반영하며 언제라도 참극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을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의료진도, 환자도 그 누구에게도 억울한 상황이 생기지 않기 위해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술과 가치관이 바뀌었듯 우린 조금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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