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과 글자
O, X 활동을 하면서 나는 아이가 한글을 조금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자기 이름과 다른 이름을 구별할 줄 알았고, 기관의 이름을 찾아낼 줄 알았다. 그리고 상징이 없이 표시되어 있는 "화장실"이라던가 "엄마" 혹은 "아기"와 같은 흔히 접한 단어들을 구별해 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에서 한글 학습을 주저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 특성상, 그 의미는 모르면서 글자와 소리만을 연결시켜 읽기만 하고 뜻을 모르게 되면 여러 가지로 다른 발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막으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발화를 촉진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말을 할 줄 아는 아이가 글을 익히는 것과 말을 할 줄 모르거나 산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가 글을 익히는 메커니즘은 다른 것 같다. 특히나 말을 못 하는 경우는 청지각적인 어려움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그 정보를 처리 혹은/그와 동시에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소리를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 글을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인 것 같다. 그런데 글을 알고 나면 그 글의 소리를 시각적으로 복기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서 발성과 발화에 도움이 되니 한글을 무조건 미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글의 기능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지 아이가 글을 알게 되어도 되느냐 혹은 알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이가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경우 반복되는 상황에서 눈치로 알거나 자기 귀에 들어오는 단어만 가지고 움직이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그 단어는 대체로 아이에게 중요한 단어들이다. 밥이나 물, 마이쮸 같은 자신의 관심이나 니즈가 확실한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호에 기초하여 한글을 노출하면 효과적이다. 그리고 청지각이 약한 아이는 대체로 시지각이 강한 경우가 많아, 시각적인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나 음료수를 사 먹이고 나면 그 봉지나 라벨을 버리지 않고 깨끗하게 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구겨지거나 손상되지 않게 처리한다(앞면 빛반사를 주의하여야 하므로, 코팅은 뒷면에 한다).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이는 것보다는 펠트지에 찍찍이로 붙이는 것을 추천한다. 교구판으로 나중에 넓은 곳으로 옮겨가 활용하기도 좋고, 소근육 연습에도 좋다. 특히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이런 방식의 활동판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기관 생활에서 하는 것을 집에서 연습시키기도 좋다.
준비된 과자 봉지를 찍찍이로 붙여둔다. 봉지의 전체를 사용하면, 그림과 글자가 함께 있어서 가르치기 좋다. 감자깡이라고 가정하자. 아이가 쉽게 오가는 곳에 둔다. 아이가 관심을 보이면 옆에서 "감자깡"이라고만 말한다. 앞뒤 사설은 생략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감자깡"이라는 소리를 가지고 있고, 이 글자가 그 소리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관심을 보이면 글자를 짚으면서 "감자깡"이라고만 한다.
알려주고 나서는 그 자리를 떠난다. 반드시 떠난다. 아이가 이걸 떼가지고 올 때까지 이런 식으로 반복한다. 떼어오면 아무 말 없이 "감자깡"라고 한다. 아이가 이걸 가지고 오면 그 봉지와 "감자깡"이라는 소리가 같다는 식의 인상 혹은 기억을 머리에 주입하는 것이다. 아이가 "감자깡"을 듣고 그걸 따라 하는 소리를 낼 때까지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감자깡"이라고 한 다음에 살짝 쉬면서 기다려본다. 아이의 관심이 떨어지거나 아이가 포기하면 다시 원래 자리에 가져가서 붙인다. 간식을 달라고 하거나 감자깡을 사달라고 하면, 감자깡 봉투를 활동판에서 가져오라고 시킨다. 가져오지 못하면 함께 가서 아이 손으로 그 봉지를 활동판에서 떼어 엄마 손으로 옮기게 한다. 받으면서 "감자깡"이라고 한다. 아이가 소리를 내면(드디어!!) "감자깡!"이라고 한번 더 알려준 다음에 즉시 숨겨두었던 감자깡을 준다. 정말 빛의 속도로 주어야 한다. 이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이해시키려면 정말 즉각적인 효과가 눈앞에서 펼쳐져야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연결을 기억하고 묶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자깡"이라는 단어를 다 말하거나 또렷하게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따라서 말하려는 시늉만 해도 바로 반응해주어야 한다. 지금은 말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단계이므로 표현하면 합격이다.
이제 아이는 감자깡 봉지를 가져와서 엄마에게 주면서 "감자깡"이라는 소리를 내면 즉시 그 과자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숙련될 때까지 이렇게 연습을 거듭한다. 나중에는 별다른 촉구 없이 아이가 활동판에서 과자 봉지를 떼어와서 주면서 뭐라고 말을 하게 될 텐데, 그러면 슬슬 한글을 추가해 주자.
감자깡 봉지 바로 밑에 한글로만 "감자깡"이라고 쓴 카드를 같이 붙여둔다. 사물카드처럼 아주 가까이에 붙여둔다. 글자에 관심을 보이면, 처음에 봉지에 대고 했던 것처럼 글자를 짚으면서 "감자깡"이라고만 읽어준다. 그러고 나서 봉지에 있는 감자깡 그림을 짚으면서 "감자깡"이라고 한 번 더 읽어준다. 두 개를 연달아 읽어줌으로써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앞뒤에 설명은 붙이지 말자. 조용히 생각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는 글자와 봉지를 조금 분리해서 나란히 혹은 위아래로 붙여서 둔다. 혹시라도 아이가 먼저 글자를 떼어오면 처음에 봉지를 가지고 했던 것처럼 "감자깡"이라고 읽어주고 나서 따라서 말하는지 보고 말을 하지 않으면 기다려준다. 흥미를 잃으면 원래 자리에 다시 가져다 붙여둔다. 만일 소리를 낸다면, 봉지는 버리고 글자만 남긴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간식들도 진도를 나간다.
소리를 내거나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일 때에는 정확도는 요구하지 않는다. 한글을 알고 모르는 것과 그것을 읽는 발음은 다른 문제이다. 아이는 글을 읽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니까 한 번에 한 가지 목표만 노린다. 이 활동의 규칙을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면, 근처에 다른 간식이나 음식을 붙여도 된다. 한 번에 3~5개 이내가 적당한 것 같다.
지금 이 단계는 아직 글을 읽는 단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글자를 상징처럼 이해해서 읽는 것이므로, 삼성 로고를 보고 삼성 제품임을 알아보고, 맥도널드의 큰 M 자를 보고 맥도널드라고 인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장실 상징도 알아보고, 엘리베이터 그림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호등의 색이 갖는 의미와 갖가지 교통표지판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글자만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간식이나 음식을 구별해서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엄청난 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