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알고 활용하는 방법
긍정과 부정. 쉬운 것 같은데 전혀 되지 않던 의사표현.
아이가 나에게 예와 아니오를 표현하는 것은 나의 오랜 소망 중의 하나였다. 징징대며 울고 있는 아이는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했고, 의사표현의 기본이 되는 포인팅조차 하지 못했다. 표정 변화도 별로 없었기에 생각을 짐작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마 그날도 , 등원하기 싫어 우는 아이를 업고 선생님 앞까지 데려다준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난히 피곤했던지, 교실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울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셨다. 그러더니 한 손은 주먹, 한 손은 손바닥을 편 상태에서 아이에게 물으셨다.
" 여기 봐. 주먹이야. 바깥놀이 하고 집에 갈래? 여기 봐, 이건 손바닥이야. 밥 먹고 집에 갈래?"
그리고는 아이로 하여금 주먹을 보게 하려고 주먹을 흔들면서 "바깥놀이"라고 다시 말하며 첫 번째 선택을 제시하셨고, 손바닥을 보게 하려고 손바닥을 흔들면서 "밥"이라고 말하면서 두 번째 제안을 제시하셨다. 동시에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주먹인지 손바닥인지 가까이 보여주면서 고르라고 하셨다. 아이는 시선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몸과 고개를 살짝 돌려서 손바닥을 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밥 먹고 집에 가는 거야? 약속이야?"
선생님의 말을 듣고, 아이는 아직 펼쳐진 채로 기다리는 손바닥을 만졌다. 그게 약속을 하고, 이걸 선택했다는 아이의 의사표현이었다.
"원래 이렇게 물어보세요?
"네, 이렇게 하면 기억해서 고르더라고요. 보통은 자기가 고른 답의 손을 만져줘요"
그렇구나. 시각적인 힌트를 가지고 아이에게 물어보면, 긴 문장은 날아가고,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다라도, 포인팅을 하는 수고로움조차 없이도 이리 쉽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 왜 나는 몰랐을까... 몰랐다기보다는 그런 식의 시도를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다.
여기에서 나는 이것을 주먹과 손바닥이 아닌 O와 X의 사용으로 확장하면 이런 시스템을 모르는 누구라도 아이와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O와 X가 긍정과 부정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갖는 상징이기에 범용성이 있는 것이었고, 달리 말하면 아이도 이 긍정과 부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여야 했다. 그래서, 도형으로서의 O와 X를 알려주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빨간색, 파란색 두 가지의 색종이를 앞에 두고 아이에게 O 카드를 준다. "빨간색"이라고 말할 때 빨간 색종이에 O카드를 두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드가 빨간색 위에 겹쳐질 때 "빨간색 맞아.", 파란색에 두면 "빨간색 아니야."라고 말을 하여 빨간색이다 / 아니다 개념을 알게 해 준다. 파란색과 관련한 표현은 이 단계에서는 하지 않으며 X 카드도 사용하지 않는다.
활동이 잘 이루어지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파란색을 찾게 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아이는 그 물건이 파란색이라는 것(변하지 않는 개념)과, 그 파란색을 자신이 지적하거나 골랐을 때 같다/다르다, 맞다/아니다와 같이 다른 말 즉 여러 개의 개념으로 지칭될 수 있고 그 맥락이 다 다르다는 것(상대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물건이나 활동이 다르게 지칭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사고 확장이 가능하다.
두 가지 색 중에서 요구되는 색을 잘 찾게 되면 긍정과 부정의 개념을 일상생활에서 확장하여 사용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색의 종류를 늘려가면서 색 찾기 활동을 계속한다. 색의 종류를 늘릴 때에는 앞선 활동에서 해당 색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하므로 색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단계에서 늘려야 한다. 앞서가면 개념이 흔들려서 다 무너진다.
긍정의 개념을 먼저 알게 하여야 하므로 당분간 X 카드로는 활동하지 않는다. 나중에 X는 틀리다/아니다 개념으로 확장된다. 욕심을 내면 안 된다.
음식이나 옷을 고르게 할 때 자신이 선택을 할 줄 아는 아이(선택을 하는 과정이 외관상 표현되는 아이)라면 포인팅 대신 또는 그와 동시에 O 카드를 쓰게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이가 좋아하는/익숙한/지금 입어야 하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을 두고 아이가 입게 될 옷에 O 카드를 얹은 다음에 그 옷을 입게 한다. 간식이나 음식과 같이 선택이 필요한 다른 활동에서도 똑같이 활용한다. 카드를 얹는 것이 익숙해지면 "좋아요"라고 말을 하면서 선택한다. 이런 경우, 여기서 X는 나중에 "싫어요"로 가르치게 된다.
O 카드를 적절하게 잘 사용한다면, 아이가 고르지 않은 선택에 X 카드를 놓은 뒤 카드와 함께 그 물건을 치워버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고르지 않은 것은 X라는 표현과 함께 선택에서 제거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아이가 X 카드를 써보려고 하기 전에는 한동안 옆에서 아이가 선택하지 않은 물건이나 카드 등에 X를 놓고 "아니야" 라든가 "싫어요" 등 상황에 맞는 부정적인 어휘를 알려주면 된다. 어느 순간 아이가 그 카드에 관심을 보이면, O와 X 중에 먼저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하면 된다. 먼저 사용하고 남은 것을 아이가 마저 사용하지 않으면, 엄마가 대신 사용하면서 표현과 함께 용도를 알려준다.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지면, 아이는 둘 다 순차적으로 사용하거나 둘 중 마음에 드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게 된다.
아이의 사진과 아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진(사람이 아닌 사진으로 시작하는 것을 추천)을 두고 아이 이름을 말하면서 아이의 사진에 O 카드를 놓는다. OOO 맞아.라고 말해준다. 다른 사진에는 X 카드를 둔다. OOO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아이가 직접 이 활동을 하게 한다. 다른 요령은 앞서 설명한 것과 동일하다. 아이 사진 밑에 아이 이름을 써 놓으면, 의외로 아이가 사진이 아닌 글자를 보고 더 쉽게 고를 수도 있다. 이것은 얼굴 인식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인데, 기관 생활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아이가 사진으로 활동하는 것을 어려워하면, 그 밑에 일단 한글을 같이 적어준다. 이 과정이 꼭 필요한 이유는 나중에 진행할 일상생활 보고하기 연습에서 함께 지냈거나 사건사고를 함께 겪은 사람에 대한 식별과 그에 관한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한글 익히기는 별도의 과정이 필요하다).
나중에는 점차 가족사진이나 친척, 혹은 기관의 아이들 사진으로 바꾸어가면서 비교의 난이도를 올려준다. 2개 중에서 고르는 것이 잘 되면, 카드의 수를 늘려서 가족 구성원이나 학교 급우들 등을 선택지로 여러 개 두고 활용한다. 이 단계까지 가면 아이는 이미 상당히 숙련된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카드 사용을 일반화시키기 위해 나는 선생님께 이 방법을 알려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하여야 하는 활동을 제시할 때 고르게 하거나 활동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에 사용하셨다. 나중에는 같이 활동하고 싶은 친구를 고른다거나 붙이고 싶은 스티커 묶음을 고를 때와 같이 다양하게 활용하셨는데, 선생님의 만족도는 물론 아이의 기관 생활 만족도나 순탄한 정도가 제법 많이 향상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중에는 아이로 하여금 제시된 단어에 O나 X 표시를 하여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등등 질문을 이해할 수 있는 수용언어를 올리고 나니 발화가 안 된 아이도 이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무발화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 것은 아이와 나의 관계를 크게 발전시킨 것은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와 소통하는 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