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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충만 Nov 13. 2018

너 그렇게 놀다가 평생 논다

놀이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2가지 시선

강연을 시작할 때 사람들에게 '놀이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면 순간 다들 멍해진다. '아 느낌 아는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딱 이 표정이다. 이윽고 한 두 사람 '노는 거요', '재밌는 거?' 같은 답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사실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어릴 때 놀아 본 경험이 있어 뭔지는 알겠는데 그걸 문장으로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약간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다. 



위 그림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7-1569)의 <아이들의 놀이(Die Kinderspiele)>라는 작품이다. 1560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놀이가 무엇인지 알아보자며 꺼낸 이유는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이처럼 집약적으로 커다란 화폭(w161 x h118cm)에 묘사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황토색과 갈색을 중심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빨간색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작품은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해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보러가기) 굉장히 많은 놀이가 숨어있다. 도대체 몇 개나 있을까?


노안이 와서 침침한 나를 대신해 이 한 작품만으로 논문을 쓴 분이 있다. 2008년 미술사 학보 31호에 실린 김원숙 강사님의 논문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총 91가지 종류의 놀이와 약 250여 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시간을 들여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면 어린아이들의 신체 특징과 몸동작, 심지어 호기심 어린 표정까지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한 번 실물을 보고 싶다. (누가 날 좀 보내주세요!!)


 

몇 가지 놀이만 꼽아서 보자면 왼쪽 위에서부터 88 올림픽이 떠오르는 굴렁쇠 놀이, 말타기, 인형놀이, 공기놀이, 이어서 아랫줄 왼쪽부터 매달리기, 팽이치기가 있다. 마지막은 특별히 이름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많이 하던 친구 던져버리기 놀이다.(맨 오른쪽에 흰색 붕대를 머리에 맨 친구가 이미 한번 당해서 복수하려는 거 같다. 아주 열성적으로 신났다)


약 460년 전 네덜란드 지역 아이들의 놀이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하던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노는 곳이나 복장, 세부적인 놀잇감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표정이나 아이들 간의 역동, 발상, 몸짓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어쩌면 놀이는 인간이 생겨난 이래로 계속해오고 있는 활동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뿌리박힌 그 '본능'으로 말이다. 원시 시대에 인간이 자연을 벗 삼아 놀던 모습이나,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16세기 네덜란드의 아이들이 놀던 모습이나, 지금 우리 아이들이나, 아니 더 나아가 500년이 지난 먼 미래의 아이들의 놀이 모습도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놀이 본연의 가치와 닿아있지 않을까? 


지금도 놀고 나중에도 놀자꾸나 ㅋㅋ 텐바이텐에서 지금도 살 수 있어요 +_+


하지만 이러한 놀이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흔히 듣는 말 중에 "너 그렇게 놀다가 평생 논다."라는 말이 있다. 놀이 본능을 억제하고 열심히 미래를 준비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반면에 "잘 놀아야 잘 큰다."와 같은 말도 있다. 놀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이처럼 차이가 난다. 국어학자 남영신의 <한국어 용법 핸드북>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놀다'에는 서로 부딪치는 두 의미가 공존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장난을 하면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노는 행위의 이쪽 끝이라면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은 노는 행위의 저쪽 끝이다. “아이들은 지금 뜰에서 놀고 있어.”라고 하면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 아들은 지금 집에서 놀고 있어.”라고 하면 그 아들과 그 집 사람들의 시무룩한 얼굴이 떠오른다. 모두 짐작하겠지만 ‘누가 어디에서 놀다’의 주어와 부사어에 따라서 ‘놀다’의 의미가 전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반된 놀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500년 전 그림을 읽는 눈도 다르게 한다. 


어떤 학자는 브뤼헐의 <아이들의 놀이>를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의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중세 시대에는 어린 시절을 진지한 사고가 결핍되어 있고, 이해가 부족한 어리석음의 시기로 보았다. 또한 브뤼헐이 살던 시대에 문헌과 속담에서 '아이들의 놀이(Kinderspel)'라는 단어는 분별없고 어리석은 행동과 동일하게 쓰였다. 따라서 브뤼헐이 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반면 어떤 학자는 감상하는 사람과 작품이 직접 만날 때 느껴지는 본능적인 직관을 강조하며 브뤼헐의 작품 속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놀이 모습에서 우리는 순수한 애정과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도덕적, 문화적, 종교적 해석을 통하지 않고 내재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활력과 순수한 이미지는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혼란 사이에서 균형감을 이뤄 긍정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중 아이들을 원숭이로 묘사한 고전 그림. 중2를 반인반수라고 말하는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놀이에 대한 다른 접근은 아동의 유년기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 기인한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언 22장 15절)"는 구약 말씀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는 신약 말씀에서도 드러나는 유년기에 대한 인식의 간극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다양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아동의 유년기를 불완전하고 미숙한 교정해야 할 야만의 시기로 보느냐 아니면 자유로움과 신비로움이 담긴 회복해야 할 본성의 시기로 보느냐의 인식 차이가 놀이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에 보면 중세 시대 놀이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실제 아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교회는 모든 형태의 놀이를 비판했다. 이들의 학칙을 보면 얼마나 완고했는지 알 수 있다. 중세 대학 전문 역사가인 영국의 래쉬달은 일상적인 여가성 놀이가 폐기되고 10~15세의 소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순수한 여가 성격의 놀이마저 금지된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그들은 도박의 비도덕성, 실내놀이, 연극, 춤의 상스러움, 종종 싸움으로 변질되는 스포츠의 과격성을 비난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놀이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도박은 위험하고 비도덕적이며 도박으로 얻은 수익은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17세기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도박이 나쁘다'는 의식은 19세기 근대가 만들어낸 도덕화 과정의 결과였다고 필립은 말한다. 도박이 도덕적 지탄을 받지 않았다면 아이들에게 금지시킬 이유도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과거 그림들에서 아이들은 카드놀이, 주사위 놀이, 트리트랙 놀이를 하고 있다. 


Young Boys Playing Dice(Murillo, 1675(circa)) 스페인 세비야에서 무리요의 작품을 보았다 아닙니까 +_+


우리나라는 과거에 어땠을까? 음주가무에 능한 민족이니 만큼 아이들의 놀이에도 허용적이었을까? 정확한 자료는 더 찾아봐야겠지만 일부 속담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놀지 않고 힘써 공부하면 훗날 그 공적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아무쪼록 공부에 힘쓰라는 말)"나 "노는 입에 염불 하기(가만히 있거나 하릴없이 노느니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와 같은 속담이다. 노는 입에 염불 하기는 고려 말 나옹화상의 ‘승원가’에 나온다고 하니 아주 오래되었다. "옆집 형은 놀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장원급제했는데 너는 도대체 애가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논 자취는 없어도 공부한 공은 남는다고 노는 입에 염불이라도 해."라는 말을 몇 백 년 전 아이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10세기에 화가들은 아동을 덩치 작은 사람으로만 그릴 줄 알았다. 사람들은 아이를 하나의 동물, 버르장머리 없는 원숭이 같은 애완동물처럼 대했다. 아이는 일종의 익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3세기에서부터 서서히 아동기를 발견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아동의 존재가 가족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은 변화는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과 그에 대한 감정,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가치 등에서 일어났던 변화에 상응한다. 


놀이에 대한 사회적 의식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분명 본능으로써 아이들의 놀이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동시에 놀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만큼이나 계속 변할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놀이는 무엇이고 우리 사회는 그 놀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더 나아가 100년, 아니 200년 후 우리의 미래 세대는 지금 아이들의 놀이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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