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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충만 Nov 21. 2018

놀이 명언 3인 3색으로 본
아이다움의 비밀

요시다 류스이의 하이쿠에서부터 야누슈 코르착, 개리 랜드래스까지

명언이라고 하면 흔히 유명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언의 사전적 의미 중 한 가지는 사리에 맞는 훌륭한 말이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들으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런 것이다. 본질을 꽤 뚫고 사안을 명징하게 묘사하는 명언은 어느 영역에나 존재한다. 놀이판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 놀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혜안을 주는 명언 3가지를 함께 살펴보자. 


1. "길을 잃은 아이는 울면서도 계속 반딧불이를 잡는다" - 요시다 류스이


<날지 못하는 반딧불이> 책 중에서


일본의 하이쿠는 5.7.5의 음률을 지닌 17글자로 되어 있는 짧은 시다. 한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찰나에 찾아오는 감성을 짧은 시에 적는다고 해서 하이쿠를 일컬어 '순간의 미학', '찰나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가는 마쓰오 바쇼인데 '오래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 물소리 퐁당'은 아마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이쿠의 예술성을 한껏 끌어올린 마쓰오 바쇼(Matsuo Bashō, 1644 - 1694)를 잇는 다음 세대가 바로 요시다 류스이(Yoshida Ryusui, 1691-1758)다. 류스이가 유명한 하이쿠 작가라는 말은 여기저기에 나오는데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까닭에 생애나 해석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 영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The lost child cries, but still he catches fireflies." 


난 이 문장을 읽고 정말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놀이할 때 마음을 너무나 잘 드러낸 문장이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아이는 무척 슬프고 눈물이 난다. 하지만 눈앞에 반딧불이가 반짝반짝하면 이내 정신을 판다. 그런 아이다움을 어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른은 어떻게든 도움을 구하거나 길을 찾기 위해 반딧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류스이가 사로잡은 찰나의 순간은 합리적인 어른들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마음 한편을 슬몃 엿보게 한다. 그야말로 '명언'이다. 


바로 요 책입니다 +_+


이 명언은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라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책에서 찾았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목사이다. 브루더호프(Bruderhof, 형제의 처소)는 독일의 저명한 강사이자 작가였던 에버하르트 아놀드(E. Arnold, 요한의 할아버지)가 1920년에 독일에서 시작했다. 브루더호프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인들처럼 일체의 사유재산 없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기독교 공동체라고 한다. 


브루더호프의 교육철학을 담은 이 책에 따르면, 부르더호프에서는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준 어른들의 스승이자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아이를 대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숭상하는 마음뿐이다. 숭상하는 마음은 진정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아이의 특성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아이들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 아이들로부터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p.164)


지난 1편에서 아동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동의 유년기를 불완전하고 미숙한 교정해야 할 야만의 시기로 보느냐 아니면 자유로움과 신비로움이 담긴 회복해야 할 본성의 시기로 보느냐. 이러한 인식 차이가 놀이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후자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 ‘아이다움’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아이다움은 놀이를 통해 현실에 나타난다. 교육철학자 프뢰벨은 "놀이를 통해 아이의 영혼에 있는 것이 자유롭게 표현된다"(p.32)라고 말했다. 브루더호프에서는 아이를 아이답게 하는 것이 교육의 알파와 오메가이고, 놀이가 이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이 담뿍 담긴 책에서 아이다움의 한순간을 포착한 요시다 류스이의 명언을 발견한 것은 우연치고는 무척 반가운 만남이다. 울며 반딧불을 쫓아가는 아이다움과 부르더호프의 교육철학 속 아이다움이 수백 년을 뛰어넘어 일맥상통한다



2.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하는 건 심장한테 뛰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야" - 야누슈 코르착




우리 집은 아파트 14층이다.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콩콩, 쿵쿵, 킁킁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층간 소음 전쟁의 시작인가. 어느 날은 엘리베이터 14층 버튼을 눌렀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15층을 누르며 "아 14층 사시는군요. 죄송합니다."라고 다짜고짜 사과를 하시는 게 아닌가. 들어보니 아저씨는 우리 윗집에 사는데 초등학교 4, 5학년 여자아이 둘을 자녀로 두고 있다고 한다. 아저씨는 한사코 미안해하며 혹시라도 너무 시끄러우면 '인터폰'으로 연락 달라고 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못 참겠으면 한번 올라갈게요"라고 말했다. 


사실 아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어른들이 큰 소리로 '좀 뛰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라'라고 역정을 내봐야 잠시뿐이다. 뻗치는 에너지를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 같다. 심장은 평상시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계속 펌핑하고 있다. 그래야 인간이 산다. 아이들도 심장처럼 팍팍 움직여야 산다. 이걸 이론적으로는 아는데... 가끔은 나도 '얘들아, 심장 좀 잠깐 멈춰줄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블룸카의 일기> 중


이번 명언은 폴란드 그림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Iwona Chmielewska)의 <블룸카의 일기>에서 만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고아들의 집(Dom Sierot)을 운영하던 유대인 야누슈 코르착의 이야기를 블룸카라는 가상의 어린아이가 일기에 담은 책이다. 2011년에 발간된 이 책을 준비하는데 작가는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코르착이 쓴 모든 작품과 문서를 읽으며 그의 생각을 따라갔고, 코르착과 고아원 아이들의 최후가 서린 트레블링카(Treblinka, 폴란드 바르샤바 인근 나치 수용소)에도 직접 가서 마지막 발자취도 살폈다고 한다.(관련 EBS 지식채널e 보기)


이 명언은 코르착이 실제 말한 역사적 언행인지, 아니면 작가가 코르착의 평소 철학에 따라 창작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흐미엘레프스카는 이 책에서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버무려 아이들을 향한 코르착의 사랑과 존중의 세계를 구성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코르착의 자료를 모두 읽으며 구절을 찾기 전에는 엄밀히 말한다면 이 명언은 <블룸카의 일기> 중 한 구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명언이 코르착으로부터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코르착이 심장을 아는 소아과 의사이자, 아동 권리를 주장한 옹호활동가였고, 글로 세상에 말하는 소설가였기 때문이다. 이 명언의 어휘나 문학적 표현, 사상은 코르착을 빼닮았다. 


<블룸카의 일기> 중 코르착의 표정이 딱 내 표정이다.. 애들아.. 쫌... 적당히


코르착은 “아이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의 인간이다.”라는 그의 생각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1911년 33살이던 해 그는 의사와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고아원 원장이 된다. 이후 코르착은 1942년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도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했다. 


코르착은 고아원을 운영하며 아이는 인간이 되기 위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성인들과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가 여러 사안을 결정하고 실천하도록 도왔다. 그는 아이들 속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비밀을 볼 수 있다며 "아이란 당신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해독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상형문자가 빽빽이 적힌 양피지 사본이다."라고 말했다. 코르착은 유행하는 사상이나 견해를 전문용어나 모호한 단어로 담는 방식을 거부했다. 대신 아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아이들이라는 양피지를 읽고 배웠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 코르착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동 권리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에 ‘아동을 위한 자유대헌장’(Magna Charta Liebertatis)'을 만들어야 한다며 '오늘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와 '아이다움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를 강조했다. "어른들은 내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 아이를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만들고, 놀라게 하고, 화나게 하거나 흥미를 주는 것을 사소하게 여긴다." 미래를 위한 존재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코르착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코르착의 고아원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아이다움을 맘껏 발산했다. 이는 온전한 인간인 아이들의 결정이었고, 오늘을 사는 행복이었다. 코르착은 이런 아이들을 관찰하며 배웠다. 도대체 누가 스승인 것일까?  



3. "새들은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헤엄을 치고 아이들은 놀이를 한다" - 개리 랜드래스




"Birds fly, fish swim, and children play"


이 명언을 남긴 미국의 노스텍사스대학교 교수 개리 랜드래스(Garry L. Landreth)는 아동 중심 놀이치료(child-centered play therapy)의 세계적인 대가이다. 그는 놀이치료를 통해 '아이다움', 즉 아동의 본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아동의 잠재력과 회복력을 믿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아동 중심이라는 것은 놀이 과정에서 상담자가 아닌 아이가 주체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실제 영상을 보시라) 이것은 단순한 기법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고 그들을 신뢰하는 하나의 태도이며 철학이라고 랜드래스는 말한다. 그러한 아동 중심의 시작은 아이가 보이는 문제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What kind of problem does this child have? => What kind of child does this problem have?) 그러면 아이는 놀이를 통해 상담자를 자신의 세계로 데리고 간다. 상담자는 그곳에서 아이의 놀이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아이라는 양피지를 읽는 것이다.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놀이가 아이들의 언어라는 것은 놀이치료의 핵심이다. 


여기서 잠깐! 놀이치료는 무엇일까? 존브라운 대학교의 상담학 부교수 닉 코넷(Nick Cornett) 박사는 "어른들은 무엇이 자신의 문제인지 쉽게 이야기하지만 아이들은 잘하지 못한다. 어른들처럼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법을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며 아이들은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놀이치료는 놀이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활용해 아이들이 자신의 문제 상황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몇 해전 개리 랜드래스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아이들이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이들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해요. 내가 나 자신으로 충분한 것처럼 말이죠. 아이들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부터 나는 이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놀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3인 3색의 놀이 명언을 살펴봤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았겠지만 이들은 제각각 다른 색이 아니라 모두 한 가지 색이다. 아이를 한 사람의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놀이를 통해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아이다움의 한순간을 읽어내려고 사려 깊은 노력을 한 사람들이다. 명언은 반드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만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놀이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이다움을 잘 포착한 명언 하나를 지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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