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바뀜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 수 있다. 단순하게는 날짜와 기온 또는 24 절기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 또는 '눈이 녹거나 꽃이 피면 봄, 나뭇잎들이 파릇파릇해지고 햇볕이 따가워지면 여름, 낙엽이 물들면 가을, 나무가 앙상해지고 눈이 내리면 겨울'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느낌이나 경험에 의해서 판단할 수도 있다. 나는 코가 예민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늘 냄새를 통해 계절을 구분하곤 한다.
문득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어느샌가 가벼움이 사라지고 꽉 찬 느낌이 들면서 몽글몽글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는 약간의 흙냄새와 나뭇가지 냄새가 살며시 이어지면서 곧 여러 가지 냄새들이 조금씩 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봄이 옴을 느낀다.
다른 무엇보다도 풀 내음이 확 들이닥칠 때가 있다. 그것도 그냥 풀 내음이 아니라, 풀을 꺾었을 때 나는 그런 강렬한 내음이. 그리고 비 온 뒤 냄새라고 할 수 있는, 젖은 흙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여름이 온 것이다.
문득 냄새들이 많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풀 냄새는 사라지고 마른 흙냄새가 난다. 떨어진 잎사귀들이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종종 군밤이나 붕어빵 냄새, 계란빵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가을의 시작이다.
어느덧 청량한 냄새만이 남는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가볍다 못해 코를 그냥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모든 냄새들이 희미해지고 얼음 냄새가 난다. 이게 정확하게 어떤 냄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그런 것 같아 늘 얼음 냄새 또는 눈 냄새라고 칭한다. 그렇게 겨울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런 계절 냄새들은 늘 추억을 동반한다.
비단 냄새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 익숙한 냄새를 맡는 순간에 그 냄새와 관련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주 쓰던 샴푸의 냄새를 맡으면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옛 애인이 사용하던 향수 냄새를 맡으면 그 또는 그녀가 떠오르고, 자주 가던 카페에서 사용하던 방향제의 냄새를 맡으면 그 카페의 풍경이 생각나고, 어릴 때 한 번 먹어봤던 음식의 냄새를 맡으면 그때 먹은 음식의 맛이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명확한 해석이 있다. 우리가 냄새를 맡으면 냄새 분자가 코 수용체를 자극하고 그 자극이 최종적으로는 '이상피질'에 전달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이상피질에서의 반응은, 뇌 부위 중 기억과 관련된 부위인 '해마'와 동기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냄새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계절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기억과 장면들이 있다. 봄 냄새를 맡으면 대학 새내기 시절에 교양 수업을 듣던 건물 앞 벤치에 앉아서, 선배들과 함께 벤치 앞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 냄새를 맡으면 군대에서 예초병들이 풀 깎던 장면이 떠오른다. 가을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밤을 주우러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겨울 냄새를 맡으면 아주 오래전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워낙 가난하기도 했고, 부모님도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크리스마스분위기는 TV에서 틀어주는 특선 영화로만 느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산타클로스는 유치원 다닐 때,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레고를 선물로 주었던, 그 산타클로스가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언제부터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되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부터 믿지 않았을지도.
그런 나에게도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이 처음 생긴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때였다. 그때 만났던 여자친구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제안을 해왔었다. 여자친구네 집에서 같이 하루를 보내자고. 하지만 그때까지 크리스마스를 딱히 특별하게 보낸 적 없던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여자친구도 딱히 뭘 할지 계획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으레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일단 케이크를 사러 갔다. 중학생 입장에서 홀케이크 하나는 꽤나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이왕 크리스마스니 기분을 내보자는 생각에 모아놨던 용돈을 탈탈 털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면 스파클링 와인을 같이 주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어서 와인도 받아왔다. 지금이야 미성년자에게 그러면 안 되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여자친구네 집에 가는 길에 같이 볼 영화를 빌리러 비디오 대여점에 들렀다. 둘 다 영화취향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쉽사리 영화를 고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게 주인아저씨께 가볍게 웃으면서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때 아저씨가 골라주신 영화는 '에볼루션'이었다. 아마 아저씨는 '나 홀로 집에'처럼 정말 가벼운 영화를 생각하며 골라주신 것 같은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여자친구와 크리스마스에 보기에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긴 했다.
그렇게 여자친구와 함께 여자친구네 집으로 가서 영화를 틀고 케이크를 꺼냈다. 당시에는 아직 미성년자라 술을 먹으면 안 되었지만, 그래도 이왕 손에 와인도 들어왔겠다, 술맛도 궁금했겠다, 한번 같이 마셔보기로 했다. 와인잔이 따로 없어서 그냥 각자 물 잔에 조금씩만 따라서 와인을 마셨다. 역시나 술맛을 모르는 나이었어서 그런지, 와인은 그저 역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둘 다 한 모금씩만 마시고는 잔에 든 나머지 와인은 따라 버리고, 병에 남은 와인은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애들답게 우유를 꺼내 우유에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영화를 봤다.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니까 어느덧 시간은 저녁이 다 되었었다. 나가서 밥이라도 먹자며 코트를 주섬주섬 챙겨서 집 밖으로 나왔다. 여자친구네 집이 반지하였어서 몰랐는데, 밖에는 어느샌가 눈이 꽤나 내려 길거리에 소복소복 쌓여있었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문을 나가 여자친구 집 문 앞에 서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여자친구는 들고 나온 목도리를 둘렀다.
그리고는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그날 먹은 메뉴가 뭐였는지, 그리고 저녁을 먹고 뭘 하며 놀았는지는 거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딱 저 문 앞까지의 기억만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겨울 냄새를 맡으면
종종 그날 문 앞에서의 장면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어릴 때는 참으로 겨울이 싫었다. 워낙에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 데다가, 겨울에 옷을 이것저것 껴입으면 움직이기 불편해서 더 싫어했다. 목도리도 하기 싫어서 그냥 폴라티만 입고 다녔고, 여러 겹 껴입는 것이 싫어서 두꺼운 외투 안에 두꺼운 티 하나만 입고 다니기도 했다. 커서는 좀 불편하더라도 많이 껴입고 다니려 했지만, 피부가 예민해서인지 내복만 입으면 따가워서 그냥 좀 춥게 다닐 수밖에 없었다. 눈이 오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눈이 내리면 길이 금방 질척해졌고, 어릴 때는 걸음걸이에 조심성이 없었기에, 밖에 나갔다 오면 늘 바지가 엉망이 되어있었다. 길에서 파는 붕어빵에도 흥미가 없었고, 먹는 음식도 대부분 따뜻한 음식으로 제한되는 것도 싫었다. 겨울만 되면 편도선이 늘 부어서 매년 고생을 했고 결국에는 수술까지 했다. 그 뒤로 편도선은 괜찮았지만, 계속해서 비염을 달고 살았다. 집안은 늘 으슬으슬했고, 전기장판을 켠 이불속이 그나마 아늑했다. 온 동네가 같이 쓰던 공용화장실을 갈 때마다 추위에 벌벌 떨다 돌아와야 했고, 가게에 붙어있는 단칸방에 살던 우리 가족은, 한 겨울에도 가게에 딸린 창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씻어야만 했다. 군대에서는 겨울에 자다 일어나 야간 경계근무를 나갈 때, 설상위장복이랑 방한복을 챙겨 입느라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려, 늘 6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피곤했고, 그 와중에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어서 급하면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겨울 냄새를 맡으면 저런 힘든 기억들보다는, 예전 크리스마스의 추억처럼 조금은 더 좋은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어릴 때 가게 난로 위에 올려놓고 구워 먹었던 고구마. 처음으로 산 온수 매트 위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기억. 손으로 짜서 너무나도 엉성했지만 정성이 담긴 목도리를 선물로 받았던 추억. 앤디워홀의 바나나 그림이 그려져 있던 패딩. 강남역 GT 타워 지하의 스케이트장. 회사 동기들하고 다 같이 갔던 스키장. 책상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 진행한 연말 파티. 군대에서 들었던 노래 '로맨틱 겨울'. 무릎까지 쌓인 눈으로 만들었던 내 키만 한 눈사람. 서른 살을 맞아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제야의 종을 들었던 양평. 너무 추워 밤새 벌벌 떨어야 했던 글램핑장. 달빛과 별빛만으로도 눈이 부셨던 천문대.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좋지 않았던 기억들은 흐려지고 대신 좋았던 기억들이 점점 쌓여만 간다. 심지어는 좋지 않았던 기억들도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점점 좋은 기억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윽고 이 모든 기억들이 서서히 흐려지고 그때의 기분과 아련함만이 불쑥불쑥 찾아와 따뜻하면서도 서글픈 기분을 느끼게 한다.
지난겨울도, 이번 겨울도, 앞으로 찾아올 겨울도 너무너무 추웠고, 춥고, 추울 테지만, 그럼에도 겨울 냄새를 맡으면 포근한 감정이 드는 건 아마도 저런 추억들 덕분이 아닐까.
매일 아련한 기분에 젖어 살고 싶어지는
겨울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