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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껏 Sep 28. 2024

"여름이 울음을 꾹 참고 있어."

아이의 말(5) 길었던 여름과 이별하는 우리 가족만의 대화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길었던 올해 여름, 그래도 어김없이 시간은 흘러 미세하게나마 저녁 공기의 감촉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9월이다. 9월 중순 즈음, 추석 연휴 내내 비가 내렸다. 높은 습도와 기온 때문에 푹푹 찌는 여름비와는 느낌이 다른,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것을 올 가을에 내린 첫 비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비. 


 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잠시 멈췄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우리 가족은 저녁 외식을 하고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나는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오겠네"라고 말했고 아이는 "이제 여름은 끝난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그럼, 여름이 자리를 비켜줘야 가을이 오지"라고 설명했다. 


 "여름이 울음을 꾹 참고 있어."


 뒷자리에서 흘러나온 이 말이 가슴을 때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늘은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눈물을 가득 머금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모습이 정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얼굴처럼 보였다.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러네. 여름이가 너무 가기 싫은가 봐. 며칠 동안 펑펑 울었잖아."

"여름이랑 가을이 싸우면 가을이 이겨?"

"여름이는 힘이 엄청 세서 가을이가 이기기 힘들어. 하지만 아무리 힘이 세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어. 결국 여름이는 가을이한테 자리를 내어 줘야 해."

"그럼 봄이는 힘이 약해?"

"봄이는 여름이가 너무 뜨겁게 다가와서 금방 도망가 버려."

"그럼 겨울이는?"

"가을이가 자리를 내어 주지 않으면 모든 걸 꽁꽁 얼려 버리지."


 어느새 4계절의 상상 속 배틀을 전개하다 보니 조금은 엉성하지만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여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덥고 뜨거워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던 여름의 마지막이 조금은 짠했다. 동시에 아무리 강한 힘일지라도 영원할 수 없음을,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유한함을 다시금 떠올렸다.  


 내 인생에서의 여름은 언제일까? 현재 진행형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갔을까? 계절만큼이나 사람 역시 여름을 보내기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인생을 누구보다 뜨겁게 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뜨거울 수만은 없다. 뜨거움에 집착하기보다 흔쾌히 가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쯤엔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겠지. 인생의 여름을 보낼 때 나 역시 울음을 꾹 참을 것만 같다. 그러나 한 번쯤은 펑펑 울면서 자리를 내어 주고 싶다. 다시 오지 못할 내 젊음을 보내며, 내 여름을 보내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뜨겁게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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