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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Feb 25. 2020

나를 기억하는 책들

1


얼마 전 우연히 유명 소설가 김영하 씨가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독자들에게 먼저 공개하는 ‘실험’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내 베스트셀러 작가 1위’니 ‘7년만의 귀환’이니 하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은 몇몇 기사와, 페이스북 친구 몇이 올린 단문들을 통해서였다. 


나는 과거에 그런 서비스가 이미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을 만큼 평범한 실험이라고 생각했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려고 기사를 찾아보았다. 


선공개 서비스는 월정액 독서앱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월 1,5900원을 내면 5만 권의 전자책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고, 국내 최고 작가들의 한정판 신간 종이책을 격월로 먼저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나는 김영하 씨의 ‘실험’이 책 버전 넷플릭스쯤에 해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나는 책이나 글을 종이로만 본다. 이런저런 참고 자료용으로, 컴퓨터 화면에서 곧장 볼 수 있는 전자책이나 전자논문을 이용할 때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어떤 정보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지 못한다. 기어이 아까운 종이에 출력해야 직성이 풀린다. 희한한 일이지만 화면으로만 보면 내용에 집중하기가 무척 힘들다.


나는 내가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곤 했다. 종이가 주는 물성(物性)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책을 손에 쥐면 책이 ‘나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 든다. 나는 책을 고르고 살 때 냄새를 맡는다. 책마다 다른 냄새가 있다. 나는 책의 표지와 본문 낱장 표면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촉감과 질감이 제각각이다.


나는 책을 들어 이쪽 저쪽으로 기울이거나, 두 손가락 끝으로 책을 집어 무게감을 가늠한다. 어떤 책은 가벼워 보이면서 묵직하고, 다른 책은 무거움을 가벼운 모양 속에 숨겨 놓고 있다. 어떤 사람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나는 그 무게감조차 책의 내용 특성이나 성격을 일정하게 보여 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책마다 다른 냄새, 촉감, 질감, 두께감, 무게감이 있다. 다채로운 색깔과 문양과 기호와 문자들이 가져다 주는 시각감은 말할 것도 없고, 표지 정보들의 배치나 본문 행 배열이 가져다 주는 특별한 공간감 들을 책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나의 감각 기관에 들어와 박힌다.


내게 좋은 인상을 남긴 책은 그 자체로 나와 깊은 인연을 맺은 ‘존재’가 된다. 책과 거기에 담긴 내용이, 그것이 내게 전해 준 냄새와 촉감과 질감과 두께감과 무게감과 시각감과 공간감과 함께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요컨대 이 책은 저 책과 다르다. 


3


김영하 작가는 이번 ‘실험’을 기자간담회에서 처음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또한 고시원, 원룸, 옥탑방을 전전하는 그들이 책의 물성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다양한 보완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우리에게 책의 물성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책을 사는 묘한 심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5만 원짜리 벽돌책을 사는 일이 누군가에는 새로운 존재와 깊은 관계를 맺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심리에 따라서 구한 책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래서 나는 “고시원, 원룸, 옥탑방을 전전하는 그들”이 책의 물성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명료하게 진단하는 김영하 씨의 말이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나는 ‘그들’이 월 1,5900원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책들의 고유한 물성을 경험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줄어들 것 같다.


4


나는 대학 시절 달동네 단칸방과 고시원과 반지하방과 옥탑방을 고루 경험했다. 그때마다 몇 권 되지도 않는 전공 책이며, 틈틈이 모은 돈으로 산 교양 서적들을 애지중지 끌고 다녔다. 


조그만 수레에 실리거나, 노끈으로 묶여 친구들 손에 쥐어진 책 묶음들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갈 때마다 내가 떠올린 건 책의 물성이 주는 부담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주는 위안이었다. 가난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나는 책과 함께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나는 고되고 힘든 시절에 만나는 좋은 책 한 권이 어떤 귀한 친구 못지 않은 큰 위로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책에 담긴 내용 덕분이겠지만, 나는 단언컨대 다만 내용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책은 우리가 어려운 시절 어느 늦은 밤 한때 책장을 넘기며 지었던 웃음과 눈물과 한숨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을 안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 본문 단락 사이에 있는 배경 사진은, 친구들 손에 들린 책 묶음과 손수레 짐칸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 남은 내 오랜 전공 책 친구들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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