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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Sep 29. 2022

예민함에 대하여

울음보가 터진 아내

추석 연휴를 앞둔 전 날이었다.


현명하게 휴가를 낸 이들은 일찌감치 귀향길 오르고, 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근무자는 왠지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이는 오후 무렵, 집사 남편에게 슬쩍 문자를 보내보았다.


"여보, 뭐해요? 오늘 저녁 외식 어때요? ^^"


말해 뭐해. 착한 남편은 나의 호출에 바로 응했다.


가만 보자, 추석 연휴 직전이라 문 닫는 식당이 많긴 한데, 사무실 근처 자주 가는 곳 중에 평일 저녁이면 한적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곳으로 일단 낙점. 그와 즐겨 찾는 곳이었고, 다행히 문을 연다고 하였다.


퇴근 시간 10분 전, 부지런한 그는 식당에 먼저 도착했고 우리가 늘 먹던 메뉴로 선 주문까지 넣었단다. 오랜만의 도심 저녁 데이트인 데다 긴긴 연휴를 앞두고 설레는 마음이 더해져 기분이 무척 좋았다.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식당으로 달려갔고 저만치 보이는 식당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그가 보이자,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러나, 로맨틱한 상황은 딱 여기까지.


자리에 앉아서 바라본 남편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다. 매우 불편해 보인다.


아, 대략 30 cm 되는 간격을 두고 놓여있는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젊은 남녀가 오늘 왜 만났는지, 뭘 먹을 것인지, 연휴에 뭘 할 건지... 잘 들린다. 너—-무 잘 들린다. 그리고 우리의 단골 식당은, 오늘따라 심하게 붐빈다. (오는 길에 보니, 대부분의 식당 문 앞에 추석 연휴로 저녁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써 붙여져 있었다.)


남편은 외부 소음이나 자극에 매우 취약하다. 본래의 성격 탓도 있고 어렸을 적 겪은 상황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뭇사람이 일컫듯 그는 일명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성향을 십분 고려해서 저녁 시간이면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식당을 일부러 찾아온 건데, 연휴 전 날 사람들이 이렇게 몰릴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상황을 모면하려면 우리가 빨리 먹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원래도 식사 속도가 빠른 남편은 더 빠르게 밥을 먹었고, 나도 서둘러 마무리했다. 내가 상상했던 저녁 데이트의 낭만은 처참히 깨져버렸다.


식당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든 나는 울먹울먹 하다가 결국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응당, 고급 호텔 식당 아닐 바에야 웬만한 식당이라면 시끌벅적함을 감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핀잔 섞인 짜증이었고, 그럼 앞으로 외식은 하지 말자는 것이냐는 치사하고 옹졸한 투정이었다.


단번에 '미안하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 흐르던 눈물은 멈췄지만,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른 후라 기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볼록하게 차오르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었다. 자신이 살아온 얘기, 자신의 예민함으로 인해 초래되는 이런 상황에 대한 답답한 마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정에 대한 아쉬운 소리에 이르기까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그의 곁에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딱히 변한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예민한 사람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나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보,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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