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judge a book by its cover
but maybe judge coffee by its cup...?
우리가 커피를 마시는 이유가 그저 기능성 음료, 액상형 카페인의 주입에 불과했더라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커피잔들이 존재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그런 거 아니잖아. 커피의 종류, 장소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색상과 모양의 커피잔들. 이것도 분명 커피의 즐거움 중 하나이거늘.
아, 물론 예쁜 잔에 담아 낸다고 해서 맛 없던 커피가 기적처럼 맛있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커피가 놓인 풍경 속에서 잔만큼 중요한 소품이 또 어디 있으려고.
커피를 담아낸 잔의 모양이 결국 커피의 모양인걸 :)
커피잔 아래에 받치는 소서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옛날에는 뜨거운 커피를 소서에 조금씩 부어서 식혀 마셨다고 하는데 -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는 거지? 이 넙적한 작은 접시에 액체를? 100% 다 흘릴 것 같은데? 흘릴세라 묻을세라 입모양을 안절부적 뾰족하게 만들어가면서 후루룩 거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귀족들의 사교행위와는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자태인데...??
다행히 오늘날에는 그런 관행이 없으니 그런 의아함은 잠시 제쳐두자. 그리고 커피잔 소서의 의미도 그새 달라졌다. 여유로움을 증명하는 소품이 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이런 것.
컵 하나만 꺼내서 간단하게 마셔도 되는데 굳이 설거지를 늘리는 소서까지 추가할 수 있는 여유. 그렇게 커피 한 상을 차려두고 느긋하게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여유. 한 손에 휙 들 수 있는 머그와는 다르게 보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거나 심지어 두 손을 써야 하는데도 이를 감수하는 여유.
아, 나에게 지금 그런 여유가 있구나. 대강 커피 한 잔 후닥 털어넣고 치우려는 게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이 휴식 또는 담소의 시간을 즐기려고 하는 거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인 거구나.
커피잔 아래의 저 작은 접시 하나에 드는 생각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상 속에서 가장 자주 꺼내들고 수시로 부담 없이 쓰는 컵은 역시 머그컵이다. 실루엣이 단순하고 소재가 튼튼하며 손잡이도 달려 있어서 집어들기 편한, 흔하디 흔한 그 컵.
만만하기 때문에 증식도 그만큼 쉽다. 충동구매, 사은품 증정, 세트 구성품, 좋아하는 브랜드나 연예인의 굿즈 등등, 이유도 종류도 다양하다. 마치 예전에 집 도처에 무슨 체육대회나 누구 돌잔치나 회갑 기념 수건들이 넘쳐났던 것처럼.
그렇게 어영부영 소유하게 됐지만 사실 디자인이나 색상이 취향이 아니어서, 혹은 다른 그릇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영 마음에 안 드는 머그컵들이 부지기수다.
촌스러운 기업 홍보용 머그를 무심코 꺼내서 물을 따라 마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 되어서 모서리 코팅이 닳아서 이제는 '금이라도 가면 바로 버릴텐데' 싶은 머그컵들도 참 수명이 길어서 별 애정 없이 계속 품고 산다.
새로 산 예쁜 잠옷을 두고서 목 늘어난 티셔츠를 계속 입게 되는 관성처럼 말이야. 사실은 새로 산 잠옷이 입고 싶은데.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입고 먹고 즐기기에도 짧은 일상인데.
내일 아침 커피는 라세라미스타의 민트초코 컬러의 머그에 내려 마셔야겠다. 주말에 한 컵 가득 따라 마실 때에는 선물 받은 시애틀 스타벅스 빅머그를 기분 좋게 꺼내야겠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은품으로 받은 H모 기업의 홍보용 머그는 아예 집에서 철수시켜서 회사 탕비실에 두든가 해야겠어. 내 공간에는 나의 취향을 꼭꼭 눌러 담아야지.
'에스프레소, 맛도 쓰고 양도 쬐깐한데 가격은 얼추 일반 커피처럼 받으니 돈 아깝고... 그걸 누구 코에 붙이니? (떼잉쯧)'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굳이 설득할 생각은 없다. 평양냉면도, 에스프레소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느 음식도 각자 취향대로 즐기면 될 일이지. 나 즐겁기에도 바쁜 세상에 남 설득할 여력 따위는 없다고. (이게 진짜 이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에스프레소 열풍에 동참해준 덕에 이렇게 멋진 에쏘빠(에스프레소바)들이 늘어난 점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고마워하고 있다. 역시 수요가 견인해주는 게 최고지, 암만.
에스프레소잔의 매력이란 뭘까.
이미 에스프레소의 매력에 제법 빠진 나의 몹시 주관적인 견해에 따르면 - 이를테면 보석함 같은 느낌이다. 사이즈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게 중요한 거지. 보석함이 무작정 푸짐하게 크다고 좋을 일인가. 귀한 것을 얼만큼 귀하게 담아내는지가 관건이거늘.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긋함을 기대하고 주문을 한 사람이 잔을 받아 들었을 때 설마 양이 적다는 소리를 하겠는가. 잔을 집어들고 향부터 깊게 음미하겠지.
사실 에스프레소잔은 단지 크기만 작은 게 아니다. 묵직하게 농축된 액체가 퍼지지 않고 좁게 고여서 향을 집중적으로 피워내는 도구이기도 하거든. 이걸 괜히 인심 쓴다고 크고 넙적한 라떼잔에 담아서 냈다고 상상해보자... 아니, 그런 상상은 하지 말고 부디 에스프레소는 에스프레소잔에 마시길.
덥고 습한 날에 절로 생각나는 시원한 생맥주. 이미 맥주가 차갑지만 꽝꽝 얼린 잔에 담아내면 그 청량감은 단지 2배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한다. 그 첫 모금의 짜릿함은 숫자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커피에서 그 정도의 호쾌함을 기대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온도 TPO를 고려한 커피잔을 보면 머리 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매한가지다. 폭염의 나날 속에서 이런 스테인리스컵에 담긴 콜드브루를 만날 때처럼.
커피가 입 안에 닿기도 전에, 아니 어쩌면 컵을 손으로 쥐기도 전에 이미 뇌리에 '시원한 감각'이 입력되는 것만 같다. 금속성의 비주얼로 뻗은 스테인리스컵, 그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부딛히는 얼음 큐브, 찰랑대는 맑은 콜드브루.
시각, 촉각, 후각, 촉각, 미각까지 완벽하게 큐레이션된 한 잔을 보면서 바리스타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내 돈 주고 사서 마시는 음료인데도!)
덧붙임. 글램핑장에서 야영 기분으로 마시는 드립백 커피는 이런 스뎅컵(이라고 하는 게 더 제격일 것 같다)에 마시는 맛이지. 열 전도 때문에 뜨거워서 쥘 수도 없으니 대강 스뎅그릇(이라고 하는 게 더 제격일 것 같다)을 받쳐들고 바깥 풍경 바라보고 있노라면 경 긔 엇더하니잇고.
결국에는 그렇다.
당신과 내가 마주 앉아서 그저 음료를 들이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닐진대.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서 고운 것을 사이에 두고 만지작거리며 어쩌면 사진도 찍으면서 오늘 함께 한 이 시간의 풍경을 기억하는 것이니까.
그 장면 속에 이렇게 눈을 즐겁게 하는 피사체가 존재하기를. 그 색상과 모양 속에 고이 담긴 커피를 보고 '와아' 또는 '맛있겠다' 하는 기분 좋은 감탄사가 나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