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2024년 07월 11일>
어제는 하루종일 시나리오 구상에만 매진했던 스텔라에게 메이든이 연락을 해왔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각자의 숙소에서는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오데뜨]까지 펜션 앞 카페 맨도롱에서 만나서 함께 걸어갔고, 블루리본 3년 연속 선정된 날치알 새우 크림 우동이
대표 메뉴라 두 사람도 고민하지 않고, 흑돼지 안심 스테이크와 날치알 새우 크림 우동을 주문했으며, 식사 이후엔 카페 맨도롱에서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도중, 스텔라가 올레길 3코스를 걸었고 첫날이었지만 해안을 따라 걸어서 좋았다고 하자, 메이든도 올레길 도보 여행에 합류하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흔쾌히 동의해 둘째 날과 셋째 날을 함께 걷기로 했다.
AM 07:30
스텔라는 속이 든든해야 한다는 생각에, 카페 맨도롱에서 따뜻한 라떼 한 잔을 마시며, 메이든을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문이 열리며 메이든이
들어온다.
오렌지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와디 럼 팬츠를 매치했고, 베이지색 버그 아웃 브림 햇 모자와 오렌지색의 끈이 포인트인 검은색 트레킹화 그리고 오렌지색과
베이지색이 배색된 배낭을 착용한 그가 입 동굴이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고, 메이든도 음료를 주문한다.
"오늘 날씨 좋아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어제 부슬비가 오고 날씨가 흐리길래 오늘도 비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4코스가 3코스보다 난이도가 낮다는데 거리는 더 길더라구요~"
"맞아~ 3A 코스는 4코스랑 총거리는 비슷한데 난이도가 더 높고, 3B 코스는 더 짧고 난이도는 비슷하대~ 총거리만 길지 걸을 만할 거야~"
"그럼요~ 평소에도 건물 사진 찍으러 많이 다니다 보니 하루에 만보씩 걸어요~ 체력 하나는 자신 있어요~"
두 사람은 카페에서 음료를 마신 후, 택시를 타고 올레길 4코스 시작 지점인 표선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며칠 전에 혼자 표선해수욕장 왔었는데 이렇게 걸으면서 보니까 다른 세상처럼 달라 보이네요~"
"그치~ 올레길 걷는 사람들이 그 말을 가장 많이 하더라~"
올레길 4코스는 난이도 '중'에 해당하는 코스로, 눈부신 표선해수욕장에서 출발해 남원 용암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인데, 총길이 19km에,
소요 시간은 5~6시간 정도 걸린다.
표선해수욕장이 있는 당케포구는 폭풍우가 많이 몰아치는 곳에 할망이 포구를 만들어줬다는 전설이 있으며, 제주 민속촌도 인근에 있어,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시작부터 당케포구의 멋진 바다를 보니,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가볍다.
푸른빛의 바다와 하얀 등대, 초록빛의 초원 그리고 노란빛과 보랏빛의 들꽃까지 어느 하나도 부족함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색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는 풍경에,
두 사람은 연신 감탄을 쏟아낸다.
"와~ 바다색 봐요~ 에메랄드빛 바다는 해외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어요~"
"우리 막내 고모도 제주도에 두, 세 달의 한 번씩 이 바다를 보러 온다는데, 여기 오기 전엔 '무슨 바다 하나 보러 그렇게 자주 가나' 했는데 이젠 너무 이해돼~"
혼자 음악을 들으며 걷던 첫날과는 달리, 메이든과 함께 걸으니,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 윤슬에 눈이 부셔, 두 사람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계속 걷는다.
어제 비가 온 후, 오늘은 맑고 화창한 날씨라서 그런지,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4코스는 결코 짧지 않은 코스다 보니 도보 여행자들을 마주하는 경우는 적었다.
하늘은 맑고 화창하지만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는 마치 달려오는 듯해 해변 가까이 가기에는 어려워 보이고, 지금 걷고 있는 이 시간이 다시 되돌아올 수 없기에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두 눈에만 담아본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만나는 갯늪과 해녀 탈의장을 지나면, 하천과 만나는 바다의 앞부분이 가느다랗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가는개' 즉, '세화'가
나오고, 숲길을 걸어 어촌마을 세화2리로 접어든다.
세화2리의 옛 이름, 가마리의 해녀 올레는 '세계 최초의 전문직 여성'으로 불리는 제주 해녀들이 바닷가로 오르내리던 길이며, 이어지는 바다 숲길은 제주 올레에
의해 35년 만에 복원되었는데, 이 길을 만들 때 해병대 장병들이 도와주어서 '해병대길'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좀 더 걷다 보니, 올레 쉼터 라는 정자가 있는데, 해안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곳이라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정자에 잠시 앉아 쉬면서 가져온 오이를 꺼내 먹는 스텔라
"오이 좋아하세요?"
"좋아하기도 하고, 등산 자주 하다 보면 배낭이 가벼워야 하는데 물병은 너무 무겁잖아~ 그래서 물병은 혹시 모르니까 챙기더라도 작은 사이즈 물병 챙기고
자주 먹거나 이렇게 오이로 대신하면 오이가 수분이 많아서 갈증도 해소되고 좋더라고~"
"아~ 등산 자주 다니시는구나~"
"주말마다 다녀~ 내가 자주 다니는 산 중턱에는 절도 있어서 가끔 기도도 하고 내려오고 그래~ 어릴 땐 테니스, 골프, 이런 여럿이 하는 운동도 많이 하고,
취미도 많았는데 모이는 것도 힘들고, 이젠 혼자 하는 등산이 젤 좋더라고~"
"다른 취미도 있어요?"
"그림 그려~ 고등학교, 대학교 때 그림을 전공하기도 했고, 계속해오던 취미라서~"
"와~ 글로나 그림으로나 예술가시네요~ 전시회 같은 것도 하세요? 작가님 그림도 보고 싶은데~"
"무슨 전시회 씩이나~ 그림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도 아니고, 열심히 그렸는데 평가받고 팔고 하는 게, 좀 별로인 거 같애~ 진로 때문에 고민할 때
우리 아버지가 해준 말인데, 1순위로 좋아하는 걸 취미로 하고 2순위로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라고 하셔서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그림이어서
대학은 잘 가고 싶었으니까 그림으로 대학에 가고,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글 쓰는 거여서 작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멋있는 말 같아요~ 그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뭘까 생각하게 되네요~"
"건축 디자인보다 좋아하는 거 있어?"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지~"
해안도로에서 알토산 방향으로 동네 안길을 걸어가니, 중간 스탬프 지점이자, 라면 등을 판매하는 식당을 발견했지만 지나가다 나오는 카페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도착 지점 근처에서 흑돼지고기를 먹기로 한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은 식당을 지나쳐 주민들이 사는 마을 골목을 걸으며 덕돌 포구로 향한다.
남원읍 태흥리에 있는 산긋 불턱을 지나면, 다시 해안 도로를 걷게 되는데, 다른 제주 지역보다 한적하고 제주 본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태흥리는 옥돔으로 유명한 마을이기도 한데, 파도 위로 올라온 옥돔의 모형으로 된 조형물이 두 사람을 반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멋진 바다와 등대를 보면서 걷다 보면, 고즈넉한 올레길 4코스가 마무리되어간다.
남원까지 이어지는 해안가로 식당들이 드문드문 있는 편이고, 산열이통부터 토산2리 마을회관 사이에 이용 가능한 카페와 식당들이 있고 중간중간 올레 쉼터도
있어서 자주 쉬어가며 걸을 수 있었으며,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 메이든과 함께 대화하며 걷다 보니, 총 5시간 반이 걸려서 걸어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고,
함께 걷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자주 쉬어가며, 수다 떨며 걷기도 했고, 첫날 걸었던 3코스보다 더 긴 거리를 걸었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덜 힘든 느낌이었고, 표선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보며
시작해 남원 포구에 있는 용암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보며 4코스가 끝이 났다.
"사실 처음 방에서 나올 때는 '6~7시간을 어떻게 다 걷지? 중간에 포기하면 작가님한테 무슨 망신이냐.' 이런 생각 하면서 나왔는데 작가님이랑 같이 걸어서
그런지, 다 걸어지긴 하네요~?"
"시작이 반이라잖아~ 이미 트레킹화를 신은 순간 시작이 된 거고~ 그 시작을 안 하면 평생 못 걷는 거지~"
"맞아요~"
돌이 많은 제주 특성상 대부분의 담이 돌로 쌓아 만들어졌고, 돌담만 몇십년씩 쌓아 온 장인들이 대를 이어, 지금도 무너진 곳을 보수하며 유지해오고 있다.
태흥리의 옛 이름이 펄개라고 해서 벌포라고 불렸으며, 벌포 연대는 해안선에 근접하는 적군의 동향을 파악 하여 방어를 한 방어 시설이 있고,
그 역시 돌로 쌓아 만들어졌다.
두 사람은 10분 정도 더 걸어가면 흑돼지 맛집이 있다는 안내소 직원의 말에,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한라산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흑오겹과 흑목살로 허기진 배를 달랬고, 가게를 나와서는 택시를 타고 카페 [맨도롱] 앞에서 내린다.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 두 사람
스텔라도 펜션까지 살살 걸어간다.
펜션으로 돌아온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가 시원한 바람에 그 땀이 식고 또 땀이 나기를 반복하면서 찝찝함에 펜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마친 후,
욕실에서 나오는 대로 내일 올레길을 또 걷기 위해 등산복부터 세탁기에 돌려 놓고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우자, 소파에 누운 채로 올레길을
걸으며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올레길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려 되짚어본다.
메이든과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올레길도 함께 걸으며 자연스러워지고 편해졌다.
서로의 사소한 일상도 공유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도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첫날보다 낮은 난이도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고, 이따금 만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메이든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설레는 감정도 느껴졌다.
세탁기가 멈추자, 스텔라는 등산복을 건조기로 옮겨 작동시켰다.
그리고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혼자 걸었던 올레길도 좋았지만 메이든과 함께 걸었던 오늘도 좋았다는 생각이 드니, 내일 걷게 될 올레길의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고, 앞으로 제주에서의 시간
또한 기대되어, 설렘을 안고 금방 잠이 들었다.
펜션에 도착했을 땐 오후 4시를 가리키던 시곗바늘이 스텔라가 잠에서 깨자, 어느새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스텔라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조금이라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다른 침대 위에 올려둔 노트북을 가져와, 양반다리 자세를 한 다리 위에 여분 베개를 올려놓고는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 작업을 시작한다.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스텔라의 눈빛이 달라졌고, 제주에서 거의 매일 바다를 보며 보낸 시간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며, 1시간쯤 지나자,
허리가 조금씩 아파오는지, 침대 헤드에 다른 여분 베개를 세워 편히 기대어 시나리오를 이어서 계속 써 내려 간다.
제주도에 와서도 매일 노트북을 켰지만,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끝이 떨리면서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과연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지,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으나,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 주부터는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이번 달 안으로는 이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을까 예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머릿속에는 다양한 장면들이 떠올랐고, 상상한 장면들을 글로 표현하면서 점점 더 몰입하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도록 그녀의 작업은 계속되었고, 올레길을 걸었던 후유증으로 고단하고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시나리오의 첫 번째 챕터를 완성한 그녀는 그제야 한숨 돌리며, 노트북과 여분 베개를 옆에 있는 다른 침대 위에 올려두고는 잠을 청해본다.
스텔라는 10년 만에 다시 온 슬럼프를 드디어 4년 만에 극복했다는 거창한 느낌보다는 한 글자도 안 써지던 글이 제주도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위로받으며
끊임없이 써보려고 노력한 끝에 늘 써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게 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