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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27. 2020

헤세를 읽는 토요일 아침


돌아왔다.

자신감 장착되고, 사람들에게 오지랖부리며, 따뜻한 대부분의 나날, 내가 ‘진짜 나’라고 믿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피해의식과, 쓸데없는 시기질투와, 못난 마음, 어두운 구름처럼 한없이 무거운 생각들. 원망, 서운함들 가득했던 쫄보, 찌질이는 잠시 안녕. 다음달에 다시 보자. 반갑지 않은 손님이니만큼 부디 짧게 머물다 가기를.


어젯밤 큰조카가 왔다. 내가 스무살이던 해 태어난 아이. 내가 올해 마흔이니, 그애는 스무살이 되었다. 이제 다 컸다고 어른행세하며 어른처럼 대해달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직도 참견하고 잔소리할게 많은 애같기만 하다. 아토피 도질세라 과자랑 콜라 못 먹게하고, 밥에 물말아 떠먹여주면 제비새끼처럼 받아먹던 수준에서, 조금도 큰 것 같지가 않은 거다. 이건 내 문제다.


언젠가 키키 키린 유고집에서, 손님대하듯,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필요이상으로 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심플하고 쿨하게 손녀손자를 대한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그때 그 글을 보면서 이제라도 그러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후로 몇가지 실천가능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테스트 결과, 그게 오히려 우리 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 같다 so far so good. 내가 낳지도 않았는데 자식처럼 too much 전전긍긍했는데 그 모습이 나와 그애 둘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았으니 방법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손님 대하듯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상처주기보다 존중해주는 사이로 나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 노력중이다.

그나저나 이 손님, 오늘 아침은 뭘 드리나...내 모든 요리를 폄하하는 분이라 요리해드려도 안드시는데. 이 손님이 스스로 조식을 해결하시면 좋겠지만, 그럴 생각은 1도 없어 보이니까.....뭘 해드리면 좋으려나.


진지충.

조카가 붙여준 내 별명이다.

유머는, 사랑처럼 대부분의 갈등과 문제에 대해 분위기 전환을 해주는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애석하게도, 내겐 그게 없다. 조카가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좀 안 진지해질 순 없어?"다.

어릴때 진지한게 좋은 덕목 같았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다보니, 그것만큼 지루한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근데 왜 이 글을 쓰게 됐지?

아. 내 컨디션이 제대로 돌아왔다는 것. 그 기쁨에 대해 기록하기 위함이었지.





마음에 방황이 일면 책도 읽히지가 않는다.

오랜만에 아침에 책을 읽었다. 몇주간 가방에 넣고 다니기만 했던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우습게 들리겠지만 전원에서, 혹은 정원에서 읽어야 정말 잘 읽히는 책이다. 근데 도시에서 읽으려....니...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여행지에서 읽으면 더 좋은책 <와일드>, 비올때 읽으면 왠지 준세이와 아오이에게 더 몰입되었던 <냉정과 열정사이>, 푸르른 나무 아래에서 읽어야 더 잘 읽혔던 이책. 주변의 공기와 날씨와 사람들, 음악이, 내가 그책을 읽고, 기억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모른다.


무튼, 아침에 이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모아둔 유튜브 리스트 중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카테고리에 담아둔 음악을 듣는데, 창문 밖으로는 새소리가 들리고, 내 침대엔 아직 손님이 주무시는 이 평화로운 아침이 눈물나게 좋은거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Rs8DAfTHnqTHVNyfUTPkes7hsvLwagQu


그러나, 애니웨이, 이 아침 내 맘을 움직인 건, 오롯이 나의 친애하는 헤세다.

이 대문호도......규칙적으로 어둠의 감정에 휘말려야 했다는 것. 이미 1962년에 죽은 이 사람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다.


#1. 이날 저녁행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략) 어느 정도는 조예가 깊은 전문가로 통할 수 있었을 그 문학의 밤 행사에서조차 나는 나를 은둔자로 만드는 고립감을 느꼈다 (중략) 내가 보고 체험한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당황하게 해서 내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일이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사이에 한번은 나를 우습게 만들지 않고 나를 인정하고 내 힘을 북돋워주는 일을 겪은 적이 있다.


#2. 내가 두려워하는 내 삶 속의 어두운 파도도 역시 일정한 규칙을 갖고 다가오곤 한다. 나는 날짜도 숫자도 알지 못한다. 나는 한번도 지속적으로 일기를 써본적이 없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따금 내 영혼 속에서 아무런 외적 원인 없이도 어두운 파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어두운 구름처럼 이 세상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중략) 평소에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 집들, 색깔 그리고 소리들이 의심스러워지고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 소리는 머리를 아프게 한다. 어떤 편지를 받아도 기분이 안 좋고 그안에 먼가 신랄한 내용이 감춰져 있을 것 같다. 이럴때 사람들과 억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고통이고 결국 피할 수 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분노와 초조함, 불만, 증오는 사물들에게로 향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증요해야할 대상은 바로 나다. 불협화음과 불쾌함을 세상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_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_



평소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에게 서운함과 불만이 생기고 내가 보고 체험한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당황하게 해서 내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일이 어디에서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들. 헤세가 겪은 그 시간들이 나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데서 오는 안도감. 친애하는 나의 헤세에게서 발견한 공통점.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굳이 공통점 발견하려는 사춘기 여고생같은 속성이 내게는 있으니까.


고흐시절에 크라우드 펀딩이 있었다면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아무런 외적원인 없이도 어두운 파도가 일어났던 헤세에게 나는 PMS 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싶다. 우리에겐 그 시기에 어두운 구름처럼 내 세상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을.

생리를 하지 않았던 헤세는, 왜 그랬을까?


정신적인 질병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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