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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절미 Nov 17. 2019

Memento mori

잉절미 2017년 1월 5일 모임

Hayley


옛날엔 아기가 1년을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잔치에야 비로소 아기를 가족으로 맞이하며 기뻐하기 위해 그것을 기념했을 거라 생각한다. 잉절미가 정확히 작년 1월 6일에 시작하였으니, 이 독서모임이 드디어 첫 돌을 지났다. 사람의 첫 돌을 기념하듯, 우리 모임의 한 살도 그러하고 싶다. 사실 첫 모임에 참가했던 사람 중 이 모임이 이렇게 오래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테다 (ㅋㅋㅋ). 그때 우리는 대부분 사회 초년생들로 앞으로 독서모임을 할 여유가 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날들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잉절미는 때로 2명, 혹은 3명이서 모임을 할 때도 있었는데, 이렇듯 숨이 끊어질 듯 말 듯 잉절미는 살아서 계절의 한 바퀴를 돈 것이다. 그러니 기특한 우리의 잉절미 1년을 기념할 수밖에. 그 속에 눈물의 삶을 버텨낸 나를 기념할 수밖에.


나는 작년 12월 초, 첫 회사를 그만뒀다. 여태껏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만 살아온 나였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갈 때도 마음을 활짝 열고 사랑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 첫 발은 디딘 곳은 안타깝게도 정글이었다. 나무 숲에 몸을 숨긴 채 나를 관찰하는 시선들. 가시 돋친 말과 억압적인 태도. 그 세상에서는 사랑을 준비한 나는 그저 아무런 가면도 무기도 장착하지 않은 무방비 상태의 바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글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상황을 보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았다. 그 공격들 속에 결국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만신창이가 되었다. 더 이상 그곳에서는 나의 장점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러나 나는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미래의 면접관이, 그에 앞서 나의 부모님이,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는 나를 약하다고 비난하지 않을까? 용기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잉절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약하면 좀 어때? 꼭 강해야만 하는 거야?" 그러게. 약하다고 비난해도 그게 나인 걸 어떡하나. 나는 사람들의 판단을 바꾸지 못한다. 그저 나에 대한 나의 평가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라도 "너는 폭력적인 공격 앞에 그저 좀 더 예민한 사람일 뿐이야. 그걸 약하다고 말한다면, 약한 것은 나쁘거나 저급한 게 아니야. 그저 사람마다 다른 특성일 뿐이야."라고 나를 지켜주면 되는 거였다. 


한 번의 죽음(the end of the working life)을 통해, 다행히도 나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슬프지만 나의 특성을 인지하려면 나와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고 깎여야만 하는 것 같다). 2017년을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나에게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깨달은 점을 남겨둔다. 


나는 즐거움을 위해 일한다. 일터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 최고가 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일 테다. 그러다 일이 즐거우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즐기는 게 목표가 아니므로 꾸역꾸역 나아간다. 반대로 나는 행복하기 위해 일 한다. 그 와중에 내가 좋은 평판을 듣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마음을 주기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분명 새로운 회사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는 일에 대한 가치관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를 자주 돌아보지 않으면 나는 어느새 파도에 휩쓸려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을 지키지 못한 채 지쳐갈 수 있다. 나는 이전 회사에서는 스스로를 잘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에 빠져있다는 걸 꽤 나중에 알게 되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더 심각해 보이는 상황을 보며 그것보다는 나으니 나는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과 아픔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내 옆에 사람이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적으로 행복하고 아파한다. 


그러다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할 땐, 그것을 발휘하여 스스로를 지켜주자.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을 땐, 상대방이 내게 폭력적으로 말 해도, '그는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닐 거야. 내가 잘 못해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라며 그 폭력의 원인을 내게 돌렸다. 그랬더니 그 폭언은 가랑비(강도는 가랑비가 아니었으나..)에 옷 젖듯 내 마음에 침투해 내 자존감을 부패시켰다. 그러다 퇴사를 앞둔 어느 날 용기 내어 '아, 지금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 거다.'하며 미움을 인정해보았다. 그러자 바로 그 미움을 튕겨내고 나를 방어할 수 있었다. '흥! 당신이 나의 이 모습을 미워한대도 소용없어. 나는 나의 이 모습이 좋거든!' 이 경험은 나에겐 신세계였다. 항상 미움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 상대방의 행동에 담긴 미움을 애써 보지 않았는데, 그것을 보고 나니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해지는 게 아닌가! 혹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도 용기를 내어 보시기를.




잉절미 1년 기념을 핑계로 나의 1년을 기념하였네. 어쨌든 이 글은 잉절미 모임 기록이니 1월 5일 모임의 내용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겠다. 나는 이번 모임에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나누었다. 



이 소설은 이반 일리치라는 판사의 죽음에 대한 동료들의 반응부터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를 사랑했다던 그들은 이반 일리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하나도 추억하지 않고, 그의 죽음으로 자신과 자기 지인의 보직 이동이 어떻게 될는지만 궁리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지 않는 건 부인이나 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아들만이 퉁퉁 부은 눈으로 아버지의 방에서 나올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의 순간까지 묘사한다. 이반 일리치는 평생을 남들이 보기에 고상해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일도, 집도, 어울리는 사람들, 심지어 결혼까지. 그러다 삶의 최고로 만족스러운 순간, 연봉을 높여 더 큰 집에 이사하여 집을 꾸미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옆구리를 다치게 된다. 그 옆구리의 병은 서서히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그가 모아둔 돈도 곁에 둔 사람도 그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이 아픔을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러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끝끝내 씨름하다, 기숙사에서 돌아온 아들의 진심 어린 눈물 속에 비로소 자신이 잡아왔던 끈들이 헛된 끈들이었음을 깨달으며, 여전히 그 끈을 붙잡고 있는 이들을 긍휼히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읽고 난 직후엔, '책 뒤편에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더니 그에 비해 소설 내용이 좀 뻔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럴만한 것이 나는 기독교인이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차근차근 세상의 성공(권위와 물질)을 쌓아갈 때 나는 그 삶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었고, 그렇게 언제 이 사람이 정신을 차릴까 지켜보다가 급격하게 죽음에 다다르니까 좀 허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설마 뭔가 더 있겠지 하면서, 다시금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특히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생각을 찬찬히 짚어보았다. 그러자 한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에 맞춰 살아가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나는 정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갔던가? 답은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를 가장 두려워하는 게 나였다. 


그럼 내가 이반 일리치처럼 죽음을 기다리며 아무도 없는 침대에 누워있다고 가정했을 때, 내 맘엔 어떤 후회가 남을까? 여전히 어려운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가 떠올랐다. 죽음을 진지하게 떠올리며 살아간다면, 엄마 아빠에게 쌓아둔 견고한 성벽이 무너질 수도 있지 있을까... 


2017년은 엄마 아빠와의 관계에서 내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그러나 폭력적이지 않게 이야기하여 내 마음속 단단한 응어리를 녹여가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일단은 이번 설에 엄마에게 직접 말하든 편지를 쓰든, 엄마가 내가 이룬 것들로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내게 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지, 그리고 존재 자체만으로 소소한 일상의 안부를 물으며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려 한다. 나 잘났다고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고, 사랑받고 싶은 연약한 나를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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