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이상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지금은 오후 10시 57분. 줄넘기를 하는지 뜀뛰기 놀이는 하는지 위층은 이 시간에도 뛰고 있다. 울림을 들어보면 우다다다다 여기서 저기로 달리는 건 아니다. 소리는 맨바닥을 찍는 소리는 아니고 어디에 걸쳐서 들린다. 두꺼운 이불을 깔았나? 그래도 안 들리는 건 아니고 괜찮은 게 아닌데.. 전혀 안 쾐찮고 괴로운데 뭐라도 깔았다는 생각으로 이 시간까지 쿵쾅거리나보다. 라고 쓰는데 우다다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밖으로는 안 나가고 방 안에서만 돌면서 뛰는 듯싶다.
소음을 피하고 싶어서 오늘, 공휴일에, 출근을 하고 막차 전 차를 타고 집에 왔다가 다시 나갔다. 막차 타고 오고 싶었는데 몇 번을 반복해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늦은 시간까지 잊을 수 있는 담력은 못되나 보다. 집에 들어올 때는 조용해서 좋았는데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니 꿍 꿍꿍 두두두두 꿍꿍꿍-. 뭐 그런 날이다.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막차를 타고 집에 오는 생활을 몇 달째 하고 있다. 미친 듯이 두들기는 층간소음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난 집이 좋고, 휴일에도 집에서 할 일이 많고,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에너지 충전이 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나에게 집은 자는 공간, 씻을 수 있는 공간으로써 구실만 하고 있다.
지금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도 쿵쾅거리는, 이 야심한 밤에도 뭔가를 바닥으로 내리치는 소음도 울리는 위층을 피하기 위해 나는 귀가 시간을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속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기록하고 있다.
연착 여부에 따라 달라지겠기만 막차를 타고 역에 내리면 밤 10시 40-50분쯤 된다. 날 밝을 때 역에 도착해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역에서 내리면 집으로 가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 있다.
1번 대중교통을 탄다.
2번 부모님께 부탁한다.
3번 걸어간다.
1번을 선택하면 머리를 고도의 전략을 잘 써서 근처 정류장과 버스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나마 빠른 경로를 통해 바로 집으로 가는 정류장은 역에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있기에 가는 도중에 막차가 가버리면 다시 다른 정류장을 물색하거나 다른 정류장에 갈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정류장도 살짝 꺾여있어서 버스를 보고 달렸으나 그냥 지나쳐버려 허망한 경우도 종종 있다.
역 바로 앞에서 출발하는 막차도 있으나 이건 너무 돌아간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걸 바라기는 하지만 이건 왠지 망설여진다. 그 시간쯤 되면 저녁을 먹었어도 배가 고파져서 버스를 오래 타면 속이 메스꺼운 기분이 들 때가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약간, 배고파서 토할 것 같은 그런 기분. 컨디션을 잘 보고 선택해야 한다.
2번은 짐이 많아서 가방이 너무 무겁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다고 판단되거나 몸 상태가 안 좋을 때 염두에 두는 선택지다. 부모님은 괜찮다고 하시는데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데리러 와달라고 연락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퇴근하셨는데 다시 또 밖으로 나와달라 부탁드리기도 죄송할 뿐더러 금세 주차장이 차서 자리를 찾으러 밖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에 타면 "위층은 어때요?", "오늘은 별로 안 뛰었어요?", "견딜만 했어요?" 이런 질문들이 내 입밖으로 저절로 나가게 된다. 무슨 말을 들을지 예상하면서도 의외의 오답을 바라며 질문하는 것이다. 이 스트레스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3번을 선택한다. 내 걸음으로 역에서 집까지 거리는 약 50-1시간. 가방이 가볍거나 컨디션이 좋아서 다리가 쭉쭉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다. 그런 날은 날아가는지 같은 거리를 걷는데도 50분 안쪽이 소요된다. 가방이 무거운 날이면(무겁지만 버틸 수 있는 무게) 훈련, 단련, 사서 고생 이런 단어들이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떠오른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날씨도 좋고 컨디션도 괜찮은 날이면 하늘 한 번 봐주고 구름도 보고 별도 보고 달도 보면서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행복에 젖는다. 가는 길에 나무가 많아 곤충 우는 소리도 크게 울리는데 희한하게 그 소리들은 끝없이 이어져도 시끄럽고 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저런 소리면 종일 들어도 좋겠다, 걸으면서 자연의 소리도 듣고 좋다, 언제 또 별도 보고 달도 보겠냐 오늘 고생했다, 잘 버텼다, 이런 생각들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사실 나는 걷는 게 좋은데 이 시간에 걷는 행위 자체는 100% 자발적인 상황에서 결정된 게 아니다보니 갑자기 울컥하는 순간들도 있다.
돈도 아끼고! 건강해지고! 남들이 볼 때는 적은 금액이라 할 수도 있지만 땅파면 버스비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한푼 두푼 야무지게 모아서 이사갈 때 보태야지! 걸으면서 어깨도 더 뒤로 제껴보고! 발바닥도 땅에 골고루 신경써서 디뎌보고! 걷기는 최고의 운동! 이렇게 긍정회로를 돌리다가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덮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앞에서 오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오는 사람도 없으면 가슴에 쌓인 울분을 입밖으로 내뱉으며 걷기도 한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답답하게 쌓인 걸 풀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럴 수 없으니 중얼거리며 별 말을 다한다.
그러다가 아파트가 보이면 현실에 수긍하기도 하고, 늦은 시간에도 원치 않는 깜짝 소음을 안겨주는 일에 놀라고 싶지 않아서 괜히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고, 근처 놀이터에 있는 운동기구에 올라 다리를 앞뒤로 움직여 보기도 한다. 이것도 날씨가 좋으니 밖에서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 추워지니 걱정이 크다. 여름엔 옷도 가벼워서 선선한 밤에 걷기 편헀는데 겨울엔 옷도 무거워지고 추워서 밖에 오래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요즘 이런 이유로 열심히 걷고 있다. 이 걸음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이상적으로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