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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r 29. 2020

호기심 천국

내 몸을 알아가는 운동

마음이 답답할 때 철학원에 가서 점을 보듯 운동하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려 점을 보는 것처럼, 완쾌 여부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계속 운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려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러너라면, 크로스핏터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ㅣ 어디가 아파요? 통증은 언제부터였죠? 하는 운동이 뭐예요?


병원에 가면 으레 이런 질문 몇 번에 진단이 끝났다. 하는 운동이 크로스핏이라고 하면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들이 질색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달리기도 추가로 한다고 하면 학을 뗐다. '좀 쉬세요'란 말을 듣고 난 후 맥없이 진료가 끝나길 반복됐다. 왜 아픈지, 정확히 언제까지 쉬라는 말도 없이 병원 문을 나서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약국에선 만병 통치약처럼 소염제를 줬다. 사람 몸이 다 다른데 염증이 났을 때는 소염제, 대증요법으로만 치료받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또한 운동 좀 쉬세요였다.


언젠가는 답답한 마음에 정확히 언제까지 쉬어야 되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다 나을 때까지라는 막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후로 웬만한 정형외과는 가지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가야 하는 허름한 건물 2층에 위치한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곧 러너인 그곳만 다녔다. 신기한 게 이 병원은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어디 프냐는 말보다 러너냐는 질문이 먼저 날아왔다. 일단 한 번이라도 방문하고 나면 차트에 기록이 남아 다음번부터는 마라톤 기록에 대해 물어왔고.


(다리 아플 ) 러너 맞지? 기록이 몇이야? 풀 뛰어봤어? 진작에 오지 그랬어. 이거 건초염인데 치료하면 금방 나아. 보자. 앞으로 대회는 춘천마라톤 남았지? 충분히 완주할 수 있어.


ㅣ  (어깨 아플 ) 머리 위로 드는 동작을 했나 봐? 이쪽 근육이 놀랐는데 달리기 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뛰는 건 팔을 앞뒤로 움직이는 거니까.


이런 진료는 치료받기 전부터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이 병원은 실제 주 고객이 러너이며 달리기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러너들의 성지라고 불렸다. 사실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운동하는 사람들이 아플 때 정말로 힘이 되는 말은 '운동 좀 쉬세요'가 아니라 '이 동작은 지금 상태로 무리고 다른 동작은 괜찮아요.' '잘못된 자세 교정해서 다음에는 안 다치게 주변 근육을 길러보시죠.' 같은 말일 것이다. 이는 아플 때까지 왜 운동하냐고, 운동 그만 하라는 분들로서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도 같은 병원에 갔다.

누가 봐도 마라토너 같이 빼빼 마른 몸. 가운보다는 싱글렛이 더 잘 어울리는 의사 선생님은 그날도 달리기에 온 신경이 집중돼있었다. 타닥. 타다닥. 찌릿찌릿한 충격파 치료와 함께 대화가 오고 갔다.


ㅣ 예전에 나이 많은 선배와 함께 산을 탔는데 웬걸,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쌩쌩 앞질러 가는데 힘들어 죽겠더라고. 대체 비결이 뭐냐 물으니 달리기라는 대답을 들었어. 뭐 그때부터 뛰게 된 거지.


선생님의 러너 인생 서막을 알리는 과거 회상과 함께 담소는 계속됐다.


ㅣ 옛날에는 버스 한 정거장도 걸어가기 싫어하고 군대에서 남들 다하는 구보도 안 했거든. 그런데 10k, 하프, 42.195km, 50km, 100km, 철인 3종까지 벌써 10년이 넘게 달리기를 해왔어.


거짓말이 아닌 게 병원 입구부터 진료실 앞까지 줄줄이 운동 관련 상패와 기록증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의학이나 연구 관련 상 대신 오로지 달리기로만. 그러니 이 선생님을 의사라 불러야 하는가? 러너라 불러야 하는가?


ㅣ 선생님, 그런데 왜 그렇게 달리기를 하시는 거예요?


다음 순간 예상치 못한 답을 듣게 됐다.


ㅣ 내 본업이 의사잖아. 호기심이 생기면 꼭 풀어야 하거든. 그래서 공부하는 거야 내 몸으로. 사람들이 다들 연골 나간다 다리 상한다 그러는데 보다시피 멀쩡하거든? 심지어 또래 중에서 제일 건강하고. 내 친구들은 성인병에 비만에 무릎 아파해. 논문 뒤져봐도 달리기가 무릎을 더 안 좋게 한다는 건 정확하게 나오지 않고. 그러니까 내 몸으로 증명해보려고.

 

광대가 다 드러난 얼굴 사이로 두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나이가 50 후반은 됐을 법한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의 자가 임상 실험은 솔직히 멋있었다.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이 분은 무려 10년이 넘게 달리기를 이어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크로스핏 또한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장거리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크로스핏 또한 몸에 좋지 않다는 설이 많았다. 한정된 시간에 고강도 운동을 해낸다는 건 오히려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라는 말.  특히나 무거운 무게를 다루는 역도 동작에서는 자세를 소홀히 해 부상의 위험이 크다는 비난을 곧잘 받았다. 그런데 대체 어디까지가 고강도 운동일까? 사람의 신체 능력은 모두 다 다르고, 운동을 하면 할수록 운용할 있는 체력 또한 상향되는데 말이다.


용불용설(用不用說)이라는 말처럼 몸은 정말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 뒷산 등반도 힘들어하던 의사 선생님이 10년을 꾸준히 뛴 덕에 이제는 풀 마라톤을 무리 없이 달리게 됐다. 이런 분한테 '풀 마라톤은 무릎 나갑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A가 아플 땐 무조건 B 약입니다라는 대증요법 또한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사람의 신체 능력은 모두 다 다르고 증상 발생 요인 또한 미미하게나마 제각각 상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의문인게, 사람이 과연 무거운 무게를 들 때 자세를 정확히 해내지 못할까? 역도 동작을 할 때 보통 하던 것보다 좀 더 어려운 무게를 앞에 두면 정신력을 고도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초보자가 완전히 얼토당토않는 무게를 들지 않는 이상, 이전보다 조금 더 무거운 무게를 들 때 큰 사고로까지 이어지기 쉽지 않다. 고작 5lb(2.26kg) 늘리는데도 그 전 단계 무게로 여러 번 연습한 후 자세를 정비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로스핏 박스에서는 본 운동을 할 때 회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코치님이 사전 무게를 지정해준다. 오늘의 운동을 브리핑받고 난 후 본인이 할 수 있는 무게의 50%, 80%, 100% 그날그날 운동에 맞춰 최적의 중량 비율이 정해진다. 이는 혼자 하는 것보다 꽤 안전하다 여겨지며 바른 운동 자세와 근육 사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회원 입장에서는 전문가가 옆에 있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운동할 수 있다.


ㅣ 운동하다 안 하면 오히려 더 아픈 거야, 그러니 쉬지 말고  


충격파 치료기가 타이머에 맞춰 꺼졌다. 치료를 마친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들더니 짧고 굵게 말을 이었다.


ㅣ 자, 또 잘 뛰어봅시다.


웃음이 나왔다. 저 말 한마디 덕분에 예전에도 풀 마라톤을 뛸 수 있었다. 병원도 나처럼 로열티 있는 환자 한 명을 얻게 됐고.


생각해보자.

달에 착륙을 원하는 과학자, 인간의 인지 행동을 분석하고자 연구하는 뇌과학자, 인류의 과거를 찾고자 헤매는 고고학자. 이 사람들이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호기심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호기심이 많다. 내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나는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우리 몸이라는 소우주가 어디까지 팽창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들고 뛰고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다. 매일 운동하는데도 아직도 알아갈 게 너무 많다.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우리 몸을 알아가는데도 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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