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제단> 1부 [제단] - 2

2-(2)

by jeromeNa
이야기 속 단서, 문헌, 유물, 신화와 전설의 인용은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 사이를 잇는 인과와 해석, 그리고 모든 사건과 사건과 관련된 역사, 단체, 인물은 허구입니다.


- 네르갈.

- 네르갈?


박재원이 되물었다. 펜을 집었다.


- 메소포타미아 신이에요. 전쟁과 역병의 신. 지하세계의 왕이기도 하고.


박재원이 펜을 빠르게 돌렸다.


- 로마는 마르스잖아. 전쟁의 신.

- 맞아요. 근데 네르갈이 나왔어요. 여기.


설형문자를 가리켰다.


- 같은 신 아니에요?


현진이 물었다.


- 비슷하긴 한데...


로시가 노트북을 열어 검색창에 타이핑했다. Nergal. 엔터.


- 네르갈은 수메르-바빌로니아 신이에요. 아주 오래됐어요. 기원전 삼천 년대부터 나와요.

- 로마는요?

- 마르스는 로마 토착신이죠. 원래는 농업과 관련 있었다가 나중에 전쟁의 신이 됐어요.

- 연관이 있을까요?


이수진이 물었다.


- 직접적인 연관은... 글쎄요.


로시가 스크롤을 내렸다.


- 아, 여기. 네르갈의 별.

- 별요?

- 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네르갈은 특정 별과 연결되어 있었대요. 붉은 별.

- 무슨 별이요?

- 화성이요.


침묵.

박재원이 펜을 탁 놓았다.


- 화성.

- 네. 네르갈은 화성의 신이에요. 붉은색 때문에 전쟁, 피, 역병과 연결됐고.

- 마르스도 화성 아니에요?


현진이 물었다.


- 맞아요.


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 로마도 화성을 마르스의 별이라고 했어요. 붉은색이 전쟁을 상징한다고.


박재원이 화이트보드에 추가로 적었다.


네르갈 (메소포타미아) = 전쟁의 신 = 화성 마르스 (로마) = 전쟁의 신 = 화성 → 같은 별, 다른 문화


- 같은 별이네요.


이수진이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 근데 왜 로마 제단에 메소포타미아 신 이름이 있지?


박재원이 물었다. 화이트보드를 봤다. 답이 안 나왔다.

대답이 없었다.


오후 두 시, 강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재원이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탄소연대측정 결과받았어요?]

- 네. 기원전 이백팔십 년이래요. 오차 플러스마이너스 오십 년.

[...진짜요?]

- 국과수가 재측정 두 번 했대요. 확실하답니다.


잠시 침묵. 전화 너머로 차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데요.]


강윤서가 말했다.


- 저도요. 그때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도 못 벗어났어요.

[로시는요?]

- 설형문자 일부 해독했어요. 네르갈이래요. 메소포타미아 전쟁의 신.

[마르스랑 다른 신이잖아요.]

- 네. 근데 둘 다 화성이래요. 같은 별을 가리켜요.


강윤서가 잠시 침묵했다. 숨소리가 들렸다.


[흥미롭네요.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

- 김 교수님 쪽은요?

[연구실 확인했어요. OO대 인문관. 특이한 건... 제단 관련 자료가 엄청 많아요.]

- 어떤 자료요?

[로마 신전 관련 책이 스무 권 넘게 있어요. 마르스 신 연구서도 있고. 메소포타미아 신화 자료도 많고. 그리고…]

- 그리고요?

[천문학 책이 많아요. 고대 천문학. 바빌로니아 천문도. 행성 관측 기록. 이런 것들.]


박재원이 펜을 돌렸다.


-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런 것 같아요. 책상에 노트도 있었어요. 용산 부지 관련해서 뭔가 쓴 것 같은데, 아직 못 봤어요. 형사님이 압수하셨거든요.]

- 내용이 뭔데요?

[잠깐 봤는데... '용산 부지', '제단', '별의 지도' 이런 단어들이 보였어요.]

- 별의 지도요?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자세히 볼게요.]


박재원이 현진을 봤다. 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도.


- 대표님, 제단 문양이 천문도일 수도 있어요.

[확실해요?]

- 토요일에 AI 분석했잖아요. 바빌로니아 천문도랑 87% 일치했어요.

[그럼 김 교수님이 미리 알고 있었네요. 천문도라는 걸.]

- 그런 것 같아요.

[지금 교수님 집으로 가는 중이에요. 집에도 자료가 있을 거예요.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오후 세 시, 현진이 화면을 봤다. 3D 모델 분석 결과. 토요일에 돌렸던 AI 패턴 매칭 프로그램. 바빌로니아 천문도 87% 일치.


- 천문도를 자세히 봐야 할 것 같아요.


현진이 말했다.


- 어떻게?


박재원이 물었다.


- 실제 바빌로니아 천문도랑 정밀 비교해 볼게요. AI 결과만으론 부족해요.

- 자료 있어?

- 검색하면 나올 것 같아요.


현진은 검색을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천문학. 대영박물관 소장 점토판. 루브르 박물관 자료. 천문 기록들. 이미지를 하나씩 열었다. 확대했다. 비교했다.


삼십 분 후, 화면에 이미지가 떴다. 대영박물관 소장. 바빌로니아 천문도. 기원전 7세기. 점토판에 새겨진 원과 선들.


- 이거요.


현진이 제단 문양과 나란히 놓았다.

두 이미지. 왼쪽이 제단. 오른쪽이 바빌로니아 천문도. 듀얼 모니터에 각각 띄웠다.

동심원 개수가 같았다. 다섯 개. 중심에서 바깥으로. 교차하는 직선 위치도 비슷했다. 각도가 거의 일치했다.


- 거의 같네요.


이수진이 말했다. 현진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 네. 근데 여기 봐요.


현진이 제단 문양의 특정 부분을 확대했다.


- 이 교차점.


안쪽 두 번째와 세 번째 궤도. 두 원이 만나는 지점. 작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명확했다.


- 이게 뭐야?


박재원이 물었다.


- 모르겠어요. 바빌로니아 천문도에는 없어요. 제단에만 있어요.


로시가 왔다. 화면을 봤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 오, 재밌네요.

- 뭐가요?

- 바빌로니아 천문도는 다섯 행성을 표시해요.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맨눈으로 보이는 다섯 개.

- 지구는요?

- 지구는 중심이에요. 관측자가 지구에 있으니까. 지구중심설이죠.


현진이 제단 문양을 다시 봤다. 동심원 다섯 개. 그리고 중심에 작은 원 하나.


- 그럼 이게 지구예요?


중심을 가리켰다.


- 아마도요.

- 그럼 이 다섯 원이 행성이고요.

- 그렇죠. 안쪽부터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 그럼 이 교차점은 뭐죠?


두 궤도가 만나는 점. 안쪽 두 번째와 세 번째.

로시가 턱을 만지며 생각했다.


- 두 행성이 같은 위치에 오는 거?

- 가능해요?

- 천문학적으로는 가능하죠. 합이라고 해요. 두 천체가 지구에서 볼 때 같은 방향에 오는 거.

- 어느 행성이요?


로시가 문양을 자세히 봤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안쪽부터.


- 첫 번째가 수성. 두 번째가 금성. 세 번째가 화성. 교차점은 금성이랑 화성 사이네요.


박재원이 펜을 탁 놓았다.


- 화성. 또 화성이네.

- 네르갈도 화성이고, 마르스도 화성이고, 이제 천문도도 화성.


이수진이 정리했다. 천천히 말했다.


- 왜 화성이죠?


현진이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박재원이 화이트보드에 또 추가했다.


천문도 = 금성/화성 합(合) → 모든 단서가 화성을 가리킴


오후 다섯 시, 강윤서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달랐다. 긴장되어 있었다.


[김 교수님 집에서 노트를 찾았어요.]

- 무슨 노트요?

[연구 일지 같은 거예요. 제단에 대해 쓴 내용이 많아요. 형사님이 지금 읽고 계시는데…]

- 뭐라고 써있어요?

[아직 다 못 봤는데... 이상한 내용이 많아요. '용산 부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로마 양식이지만 로마가 아니다', '별의 지도를 찾았다'...]

- 별의 지도요?


박재원이 현진을 봤다.


[네. 그리고... '금성과 화성이 만나는 곳'이라고도 썼어요.]


박재원이 숨을 멈췄다.


- 뭐라고요?


['금성과 화성이 만나는 곳. 그곳이 시작이다.' 이렇게 썼어요.]


현진이 화면을 가리켰다. 교차점. 금성과 화성 궤도가 만나는 곳.


- 대표님, 제단 문양이 맞아요. 금성이랑 화성 궤도 교차점이 표시되어 있어요.

[확실해요?]

- 네. 바빌로니아 천문도랑 비교했는데, 제단에만 이 교차점이 있어요.


전화 너머로 강윤서가 최 형사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웅얼웅얼.


그리고 다시 강윤서 목소리.


[형사님이 노트 전부 압수하셨어요. 내일 오전에 경찰서에서 회의하자고 하시네요. 같이 가실 수 있어요?]

- 네. 몇 시요?

[아홉 시. 서울지방경찰청.]

- 알겠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세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반에 연구실 집합이요.]

- 네.


전화를 끊었다.

여섯 시가 되었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북촌 골목에 가로등이 켜졌다.

박재원이 화이트보드를 다시 봤다. 오늘 추가된 것들이 빼곡했다.


기원전 280년 네르갈 = 화성 마르스 = 화성 천문도 = 금성/화성 합 김 교수 = 미리 알고 있었음
별의 지도, 금성과 화성이 만나는 곳


답보다 질문이 더 많아졌다.


- 내일 더 알게 되겠죠.


이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가방을 챙겼다.


- 그러길 바래.


박재원이 노트북을 닫으며 대답했다.


- 김 교수님 노트에 답이 있을 거예요.


로시가 말했다.


불을 껐다. 연구실이 어두워졌다.

계단을 내려갔다. 딱, 딱, 딱. 네 사람의 발소리. 나무가 삐걱거렸다.

밖으로 나왔다. 월요일 저녁. 찬 공기의 북촌 골목은 조용했다.


- 내일 봐요.

- 네.


현진은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기원전 이백팔십 년. 로마도 메소포타미아도 한반도와 교류가 없던 시대. 그런데 제단이 있다. 로마 양식. 메소포타미아 문자. 바빌로니아 천문도. 그리고 금성과 화성.


왜.


그리고 김 교수는 왜 미리 알고 있었을까.


별의 지도.

금성과 화성이 만나는 곳.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둠.


화성.

모든 게 화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르갈. 마르스. 전쟁의 신. 붉은 별. 천문도의 교차점.


그리고 금성.

무슨 의미일까.


김 교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라진 걸까.


답이 없었다.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뭔가 더 알게 될 것이다.


김 교수의 노트.

거기 답이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