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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단서, 문헌, 유물, 신화와 전설의 인용은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록 사이를 잇는 인과와 해석, 그리고 모든 사건과 사건과 관련된 역사, 단체, 인물은 허구입니다.
"MARTI PATRI SACRVM" (마르스 신, 아버지에게 이것을 봉헌하노라.)
- 로마 제국 마르스 신전 봉헌 비문
토요일 아침 일곱 시, 북촌 골목이 조용했다. 관광객도 없었다. 현진이 연구실 계단을 올라갔다. 딱, 딱. 오래된 나무가 삐걱거렸다.
강윤서가 이미 와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 일찍 왔네요.
- 네. 장비 체크하려고요.
현진은 가방을 내려놓고, 3D 스캐너 보관함으로 갔다. 케이스를 열었다. 스캐너 본체, 삼각대, 케이블. 하나씩 확인했다. 배터리 충전 상태가 완충된 것을 확인했다.
박재원이 도착했다. 빠른 걸음이었다. 가방을 책상에 던지듯 놓았다.
- 어젯밤 내내 자료 찾아봤는데 답이 없어요. 로마가 한반도까지 올 이유가 없어요.
- 실크로드는요?
강윤서가 물었다.
- 그것도 기원전 이세기 이후예요. 그전엔 기록이 없어요.
이수진이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목소리. 가방을 조심스럽게 걸어놓고, 장비실로 가서 샘플 채취 키트를 챙겼다. 드릴, 비닐봉투, 라벨. 장갑도.
로시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머리가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 미안해요. 토요일이라 깜빡하고...
- 괜찮아요. 출발하죠.
강윤서가 차 열쇠를 집었다.
강윤서 차에 모두 탔다. 박재원이 조수석, 뒷좌석에 이수진, 현진, 로시.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북촌에서 용산까지. 토요일 아침이라 길이 비교적 한산했다.
박재원이 스마트폰으로 자료를 계속 봤다.
- 로마 신전...
스크롤을 빠르게 내렸다.
- 정사각형 기단, 계단식 제단, 측면 부조... 전형적인 양식이에요.
- 한반도에서 발견된 로마 유물이 있긴 해요?
강윤서가 물었다.
- 직접적인 건 없어요. 하지만 글라스 구슬이 신라 고분에서 나온 적 있어요. 대부분은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외래품으로 알려져 있어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로마는 유리 생산 대국이었어요. 기술 전파돼서 전해졌어요. 근데 제단은 처음이죠. 제단은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그 자리에 세우는 거예요.
- 그럼...
- 누군가 여기 와서 세웠다는 얘기예요.
여덟 시 사십 분, 용산 도착. 공사 현장 입구에 임시 펜스가 쳐져 있었다. 차를 세웠다. 박물관 담당관이 펜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대 중반 남자. 안경을 썼다.
- 박 소장님, 오셨습니까.
악수를 나누고, 박재원이 팀원들을 소개했다. 담당관이 경비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 문화재청 협력 조사팀입니다.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펜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굴착기 두 대가 멈춰 있었다. 작업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쉬는 모양이었다. 중앙에 구덩이가 있었다. 깊이 약 삼 미터. 그 안에 돌 구조물.
- 발굴 책임자 김 교수님이 아직 안 오셨어요.
담당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아침부터 계속 전화하는데 받질 않으시네요. 일단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담당관이 구덩이를 가리켰다.
- 저겁니다.
박재원이 구덩이 가장자리로 갔다. 멈췄다.
제단이었다. 정사각형 기단. 약 이 미터 × 이 미터. 높이 일점오 미터. 화강암으로 보였다. 표면이 풍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형태는 명확했다. 계단식 단이 세 개. 상부에 평평한 제의 공간.
박재원이 숨을 참았다.
로마 제단의 전형적 요소를 갖춘 석조 구조물이었다. 기단의 비례와 남아 있는 단차 구성은 로마 제단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과 맞아떨어졌다. 제단 측면에 홈이 파여 있었다. 부조를 넣었던 자리. 그리고 상부 가장자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기하학적 패턴.
- 내려가도 됩니까?
박재원이 물었다.
- 사다리 있습니다.
담당관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내렸다.
담당관이 먼저 내려가고, 박재원이 뒤따라 내려갔다. 딱, 딱, 딱. 사다리를 밟는 소리. 이수진이 뒤따랐다. 현진은 장비 가방을 메고 내려갔다. 로시도 카메라를 들고 내려왔다. 강윤서가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제단 앞에 서서 가까이서 보니 더 명확했다. 풍화 정도. 표면 질감. 기단부 모서리 처리. 로마식이 맞았다. 하지만 여기는 서울이다.
박재원이 장갑을 꼈다. 제단 표면을 만졌다. 거칠고, 오래되었다. 손가락으로 홈을 따라갔다. 측면 홈 안쪽. 뭔가 새겨져 있었다. 문자 같았다.
- 사진 먼저 찍어야겠어요.
이수진이 카메라를 꺼냈다.
셔터 소리가 연속으로 울렸다. 정면, 측면, 후면, 상부. 모든 각도에서. 이수진은 천천히 움직였다. 한 각도에서 여러 장씩.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박재원은 제단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측면 홈을 자세히 봤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켰다. 홈 안쪽을 비췄다. 문자가 선명했다. 쐐기 모양. 가로로 길게, 세로로 짧게.
설형문자였다.
- 로시, 이거 봐요.
로시가 왔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십 초. 이십 초. 삼십 초.
- 설형문자예요.
- 확실해요?
- 네. 근데...
로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 로마 시대엔 이거 안 썼어요.
- 언제 썼는데요?
- 메소포타미아요. 기원전.
박재원이 펜을 집었다. 돌렸다. 빠르게.
로마 양식. 메소포타미아 문자. 한반도.
연결이 안 됐다.
- 스캔 시작할게요.
현진이 3D 스캐너를 조립했다. 삼각대를 펼쳤다. 높이를 조절했다. 스캐너를 올려 수평계를 확인했다. 노트북을 연결했다. 부팅음.
계단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담당관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 네, 지금 조사 중입니다... 네... 최대한 빨리...
현진이 스캔을 시작했다. 레이저가 제단 표면을 훑었다. 빨간 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노트북 화면에 3D 모델이 실시간으로 생성되었다. 점들이 모여 선이 되었다. 선들이 모여 면이 되었다.
제단 정면 스캔이 끝났다. 현진이 스캐너를 들어 올렸다. 삼각대를 옮겼다. 측면으로. 다시 설치했다. 수평을 맞췄다. 스캔 재개. 레이저가 다시 움직였다.
한 면이 끝나면 다음 면으로. 정면, 우측면, 후면, 좌측면. 그리고 상부. 모든 각도에서. 삼각대를 다섯 번 옮겼다.
이수진이 제단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표면을 살폈다. 후면 하단. 이미 일부 깨진 부분이 있었다. 모서리 돌 하나가 약간 결손 되어 있었다.
- 여기서 채취하겠습니다.
이수진이 결손 부분을 가리키며, 담당관을 향해 말했다.
담당관이 다가와 자세히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 최소한으로만 부탁드립니다.
- 물론입니다.
이수진이 작은 스케일러를 꺼냈다. 드릴보다 정밀한 도구였다. 이미 결손 된 부분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댔다. 천천히 긁어냈다. 돌가루가 조금씩 떨어졌다. 일 그램도 안 되는 양. 비닐봉투에 담았다. 라벨을 붙였다. 용산-제단-01. 날짜. 시각. 채취 위치: 후면 하단 결손부.
박재원은 제단 상부를 봤다. 문양이 복잡했다. 동심원이 여러 개 겹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직선들이 교차했다. 천문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아홉 시가 되자 사람이 왔다. 개발업체 현장소장이었다. 사십 대 초반. 안전모를 썼다.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 언제까지 걸립니까?
- 최소 이틀은 필요합니다.
담당관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 이틀이요? 월요일까지 공사 못 한다는 얘기입니까?
담당관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 문화재 보호법에 따라...
- 손실 보상은 어떻게 됩니까?
- 그건 나중에...
목소리가 커졌다. 박재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단 측면 홈을 다시 봤다. 로시가 사진을 확대해서 찍고 있었다. 플래시를 켰다. 문자가 더 선명해졌다.
- 해독 가능해요?
박재원이 물었다.
-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변형된 형태라서.
- 얼마 나요?
- 오늘 안으로는...
열 시쯤 되자 스캔이 절반쯤 진행되었다. 현진이 노트북 화면을 봤다. 3D 모델이 점점 완성되어 갔다. 제단 형태가 디지털로 재현되었다. 문양도 스캔되었다. 상부 동심원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수진이 추가 샘플을 채취했다. 제단 측면에서 두 군데. 상부에서 한 군데. 총 네 개 샘플. 모두 비닐봉투에 담았다. 라벨을 붙였다. 각각 다른 위치 표시.
박재원은 제단 주변 흙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혹시 다른 유물이 있을까. 손으로 흙을 조금씩 치웠다. 붓으로 먼지를 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제단만 있었다.
열한 시, 담당관이 내려왔다. 표정이 어두웠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 김 교수님이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강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 어젯밤부터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