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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Oct 07. 2020

명의만 집주인이면 다 인가요

몰지각의 끝판왕

벌써 두 번째 내용증명을 보냈다. 


첫 번째 내용증명에 집주인이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집을 사놓고도 내 보증금을 받지 못해서, 구입한 집의 세입자에게 챙겨줄 보증금을 마련할 수도 없다. 내 집이라는 곳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의 유치원 근처로 이사하기 위해 이 집을 계약했고, 2년 정도 살 때쯤이었다. 

더 이상 여기저기 얹혀살며, 전세금만 올려주는 게 더 부담으로 다가와 가족들과 상의 끝에 모험을 강행했다. 시골의 노부모님의 도움을 좀 받고, 은행 대출을 받고, 전세 세입자가 있는 아파트를 구매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의 계약이 끝날 때쯤, 그곳의 세입자에게 지금 사는 곳의 전세보증금을 받아서 준다면, 모든 게 순조롭게 이사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첫 번째 내용증명에는 언제쯤 이사를 나갈 테니 보증금을 준비해달라는 내용으로 임대인에게 내용증명을 송달하였다. 


이 집의 집주인은 이 근처 부동산 중개업자의 조카였다. 

그러나 처음 부동산 임대 계약할 때도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의 위임장을 가지고 있는 그의 고모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너무 미심쩍어 계약금을 입금하던 날에, 그에게 전화를 해서 계약금을 입금받았는지 확인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고 부동산 계약이 만료가 거의 다 되어 가는 무렵이었다. 

두 번째 내용증명을 보냈다. 

보증금을 주지 않으면, 그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적인 책임을 물 수 있다는 말을 넣어 조금 강력하게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송달 등기를 보냈으나, 그는 역시 소식이 없다.

그의 부동산 대리인? 정도가 되는 (중개업자)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계약할 때는 대리인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당사자와 이야기하라는 말로 그들은 핑퐁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사 들어갈 집에 살고 있는 세입자는 다른 집의 이사를 위해서 계약금 명목의 돈을 미리 줄 것을 나에게 요청하기도 했으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속이 타들어 갔다.

집이 생겼어도 못 들어가는 상황.


한참을 속을 태우고, 연락이 안 되는 집주인 때문에 나는 2년을 그 집에서 더 살기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임대인이 연락도 안 되니 이건 분명 묵시적 갱신인 것이다. 정확히는 반강제 계약갱신이었다.

이사 들어갈 곳의 세입자에게 2년만 더 사는 게 어떻겠냐라고 제안을 했다가, 얼마 전까지 이사 나가라고 하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분은 이사 들어갈 집을 새로 구해 가계약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하는 수 없이 내가 그 가계약금을 물어주는 조건으로 세입자를 달래야 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나는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었는데, 지금 사는 곳과 앞으로 이사 들어갈 곳의 학군이 갈라져, 아이는 도로 하나를 건너 1년 만에 다시 전학을 가야 되는 상황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 그해 겨울은 유독 날이 추었다. 

살고 있는 건물의 수도관이 얼어, 한동안 수돗물을 쓸 수 없게 된 때가 있었다. 두 아이를 씻기기 위해 아래 윗집에서 물을 길어와 씻기기도 하고, 그 씻을 물을 받아 변기에 부어 용변을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2년.

나는 보증금을 받아야 하고, 나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내줘야 하는 시점이 왔다.

그런데 다시 집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사이 근처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여파로 역전세 현상이 펼쳐진 것이다. 

갑자기 쏟아진 아파트 물량에, 기존 집들은 예전의 전셋값보다 거래되는 전셋값이 싸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말 그대로 내 전세보증금에 정말 조금만 돈을 더 보태면 이 집을 살 수도 있는 이곳에서 나는 ‘깡통전세’를 살고, 보증금을 바로 받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은행에 대출을 받아 세입자에게 주고, 그 집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그리고 살던 집은 임차권 등기를 설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임차권 등기 설정을 위해 집주인에게 송달을 보냈으나,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이 왔다. 

이 인간이 2년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반송된 임차권 등기 송달을 가지고 동사무소에 가서 그의 초본을 요청하여 그의 주소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2차 송달.


또 반송이다.

집에 아무도 없단다.

정말 짜증이 났다. 

법원에 문의한 결과, 이런 경우, 송달을 받건 안 받건 송달로 취급하는 ‘임의 송달’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임의 송달을 진행하려고 마음을 먹던 찰나에, 그가 3차 송달을 받게 되었다. 

이사를 나가기 전에 극적으로 임차권 등기가 설정된 셈이다. 


(글을 쓰는 동안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오른다. 이제부터는 그 인간이라고 칭하고 싶다)

임대인도 임대인 나름이다. 

그 인간은 내 보증금에 조금 더 보태서 경기도의 새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보증금을 내 줄 능력도 안 되는 작자들이, 임차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것들이 임대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개탄스러웠다. 


내 보증금을 받기 위해서는 그 집에 새로운 세입자를 빨리 구해야 했다.

혹시 안방에 해놓은 아이의 낙서 때문에 새로운 세입자를 잘 못 구할까 싶어, 내 돈을 들여 도배도 새로 했고, 집을 보시는 분들에게 어필을 위해서 작은 편지도 써놓았다.

도배를 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집이 계약되었다는 연락을 부동산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제는 내 보증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계약자가 이사 들어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집이 계약이 되자, 그 인간의 고모는 다시 부동산 대리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임차권 등기 때문에, 새로운 세입자가 불편해하니 이사 들어오기 전까지 임차권등기를 해지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나도 세입자였으니, 그 상황이 충분히 이해돼서, 그분이 이사 들어오기 전날 나는 임차권 등기를 말소해 주었다. 


그런데 세입자가 이사 들어오는 날, 잔금을 그 인간한테 송금했다는데, 도통 그 인간에게 연락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문서상, 임차권등기를 말소한 셈이니, 말 그대로 나는 어떤 채권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냐는 나의 전화에 그는 집의 여기저기에 낙서가 있고, 문이 조금 흠집이 있고, 등등. 하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아, 이 양아치 놈.

도배도 내 돈으로 미리 해주고, 집을 깨끗이 하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심통을 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인간의 고모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사기죄로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게 되었다.

...

그리고 한 시간 뒤에 

폭풍 같은 말다툼 끝에, 겨우겨우 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 집은 처음부터 ‘깡통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사를 들어올 때, 통상적으로 잔금은 집주인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임대인인 그는 부동산 잔금을 직접 받아가질 았았다. 대신 나는 중개업자와 함께 근저당을 설정해놓은 은행에 직접 가서 그 돈을 내고 근저당을 말소했다. 등기부등본상 제1채권자가 세입자인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이사를 들어오면서 집주인 대신 은행에 돈을 갚게 된 셈이다. 돈은 집주인이 은행 가서 근저당 잡혀 빌리고, 빌린 돈은 세입자가 은행 가서 갚게 하고, 집을 뺄 때는 다른 세입자를 구하기 전까지는 보증금을 돌려받지도 못하는 꼴인 것이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주인인 척하고 허세 부리는 인간들.

내용증명 상에는 못 보증금에 관련한 금융비용까지 청구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지만, 그건 단지 말일뿐이었다. 그나마 돈을 떼이지 않고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셈이었다.

이러니까, 이런 인간들 때문에, 너네 때문에

더러워서

사람들이, 내가, 빚이라도 내서 집을 산다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다.


실체도 없는 깡통들 앞에서 

그 사이를 비집고, 한 숨을 쉬기도 해 가며,

때론 분을 삭여가며, 

아주 가끔은 안도하며, 


나는 오늘도 서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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