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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Oct 13. 2020

도배를 해주다

기억도 지워본다


새로운 세입자를 기다리며, 도배를 내가 해주기로 했다.

타 지역은 모르겠으나, 서울은 이사를 들어오는 세입자가 도배나 장판을 하고 이사를 들어오는 것이 관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나가는 내가 도배를 해주고 나가기로 했다.

가뜩이나 부동산 계약이 안되어 내 보증금을 받지 못한 내가, 혹시라도 집 이곳저곳의 아이의 낙서 때문에 세입자를 구하는 게 더 어려울까봐, 새로 이사 들어오시는 분이 혹시 부담을 갖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세입자였던 내가 도배를 해야 했으니 하는 수 없이 전세보증금을 받지도 못하고 이사를 나가야 했다. 

집주인이라는 작자의 임차권 등기 송달의 반송을 이겨내고, 여러 차례의 홍역을 거쳐 겨우겨우 임차권등기도 설정해놓았다.


도배하기 전날, 이런저런 색연필 낙서를 지우러 다시 그 집을 찾았다. 


4년 전에는 살던 예전 집을 이사 나갈 때, 짐을 빼낸 빈 집을 찾았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때 그 집을 찾았을 때는 아쉬움에 빈 집을 한참 동안 배회했었다.

괜히 이사했다는 아쉬움에.

신혼부터 꾸미고 첫아이를 낳아 여기저기를 바꾸어온 기억들이 떠올라,

서울에서 혼자이다가 같이 생활을 하던 그 공간의 추억들이 피어올라,
한참 동안 목이 메었었다. 


그런데, 똑같이 이사를 나가는 이 집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4년을 살았던 집인데도 그 안에 추억들이 회오리쳐 아쉬움이 묻어날만한데도, 

이상하게 이 집에서는 벽에 그어놓은 아이의 낙서만큼이나 편치 않은 기억들이 몰려온다.


덕지덕지 아내와 심하게 다툰 기억

덕지덕지 아이들이 울던 기억

덕지덕지 소리친 기억

덕지덕지 고달픈 기억

덕지덕지 미안한 기억

그런 마음이 덕지덕지 스며든다.


여기저기 아이의 낙서를 지우며, 마음을 후벼 파던 기억들도 같이 지워본다.



사진출처 : http://ch.yes24.com/Article/View/17826

https://www.yna.co.kr/view/AKR2015030615560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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