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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Sep 02. 2020

피싱을 당하다

자책에 대비하는 자세


엘리자가 말했어요
Eliza said that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My world is not going the way I think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However, it is incredible that I can't think what is going to happen.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거요
Because what I didn't expect is happening

- 빨간머리 앤, 중에서


몇 해 전 더운 여름날이었다. 

다음날부터 처갓집 식구들과 제주도로의 짧지 않은 휴가가 계획된 탓에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일을 하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휴가 탓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업무에 집중은 잘 되지 않았고, 일의 속도는 더디였고, 마음만 급해져 있었다. 


그때였다.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서 옆 사무실 후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컴퓨터에 깜박깜박 거리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형님 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야,, 나 바쁜데..’

바쁜 와중에 몇 마디 나누었는데, 

평소와 똑같은 그의 말투. 느릿하고 살짝 답답한 예의 바른 말투.

이상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대화창을 확인했다. 

그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17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틀 뒤에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내가 아는 그 후배는 지방의 유지라 불릴 정도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얼마나 다급한 일이길래 돈 많은 냥반이 나한테 어려운 부탁을 할까 싶어,

바쁘기도 하고, 마침 그날이 월급날이기도 해서,

이틀 후면 바로 받을 수 있다 하니, 바로 알려준 계좌로 입금을 했다.

받는 사람 이름이 ‘현백*’라는 이름이었는데, 그게 그 후배의 이름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그렇거니 하며 바로 입금을 해주었다. 


잠시 후, 핸드폰으로 **은행이라고 발신표시가 찍혀있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마케팅 전화인 듯싶어, 바로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가 또 울렸다.

“다시 이 번호로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말고 끊으려 하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전화인 줄 알고, 전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되려, 나한테 화를 내는 그 목소리가 당황스러워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하고 듣게 되었다.


“방금 **계좌에 돈을 입금하셨죠?, **은행 모니터링실인데요, 해당 계좌가 피싱 의심 계좌입니다. 한번 송금하신 분께 확인 좀 해보세요..”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입금자명을 확인도 안 하고, 입금을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그러고 나서 그 후배를 찾아 옆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후배의 책상은 비어있었다.

“혹시 장ㅇㅇ씨 어디 갔어요?”

“오늘 휴가신데요..”

“네??!!”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두 발이 얼어붙었다.

이상하고 황당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돌아와 그 후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무슨 일이냐며, 나한테 연락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아..내 돈.. 내 생활비..”

정말 말로만 듣던 피싱을 나도 당한 것이었다.

보이스 피싱만 있다고 들었지, 이런 메신저 피싱이 있다고는 생각을 잘 못하고 있었다.

그 후배의 메신저 계정을 해킹하여, 그 후배의 메신저 말투와 습관을 너무 똑같이 따라 해서 나는 의심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어설픈 예의바름.

내가 정의하는 그의 메신저 어법을 똑같이 흉내 냈던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입금자명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의심 없이 바로 입금을 했던 것이었다.


그날 내가 무엇에인가에 쫓기듯 일을 하지 않았다면,

다음날이 휴가이지 않았다면,

입금자명이 후배 이름이 아닌 것을 의심하여, 후배에게 전화하여 확인만 했었다면, 

그 메신저를 통해서 보이는 그 후배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면,

그 후배가 아예 더 큰 금액을 빌려달라고 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걸 당한다는 게 너무 바보 같고 한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사고가 그러하듯.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 사건을 잊고,

부족한 생활비는 마이너스 통장의 신세를 지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달 뒤 금융감독원에서 전화가 왔다.

“혹시 ㅇㅇㅇ씨 되시나요?, 피싱당하시고 신고하셨었죠?”

“네”

“그때 경찰서에 신고하시고, 해당 계좌를 압류하게 됐고요, 그 계좌에는 ㅇㅇㅇ씨가 입금했던

그 금액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돌려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

“와! 정말이요?!”


두 달 뒤 나는 그 금액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내가 그 금액을 돌려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해당 계좌에 대해서 사기범들이 이미 이전 피해자의 돈을 인출해가면서, 금융기관의 모니터링에 걸렸던 것이었고, 그 이후에 내가 입금을 하게 되면서 그 계좌에는 내가 입금한 돈만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이전 피싱 피해자들이 경찰서에 고발하고 그 계좌를 같이 압류했다면,

피해금액의 지분만큼 내가 입금했던 돈에서 나눠서 갖게 되는 구조였는데,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또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나보다 먼저 그 계좌로 입금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이 이미 다 인출되어버린 걸 확인하고,

신고조차도 포기했던 진짜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내 돈을 전액 다 찾아서 다행이었지만,

그 돈을 전액 다 찾았다는 것은, 이전 피해자들이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서 고스란히 피해액을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좋지만, 실상은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아주 찝찝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라도 신고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나는 다른 계좌로 입금을 하게 될 때는 입금자명을 반드시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전화로 당사자에게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모바일이나 PC 메신저를 통해 누군가가 입금을 요청하는 경우, 반드시 전화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피싱 사건을 당하고, 바로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을 때 만났던 경찰관의 말이 생각이 난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하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누구나 다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들 그 순간에는 뭐가 씌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어떻게 일을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빨간 머리 앤은 모든 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서

더 멋지다고 했지만, 모든 게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좋은 일들, 적어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들은 생각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도 좋게 마련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 다른 사람들의 아픔으로 엮긴 일들은 

나에게 오는 결과가 나쁘지 않다 하더라도, 반드시 좋아할 수는 없는 일도 있다.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삶에서 마주한다 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는 것이 다가올 인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흘러가도록 두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해야 되는 최소한의 일,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찾는다거나 신고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함을 어렵게 배워나간다. 

모든 좋은 일이 그렇게 끝나지 않듯, 모든 나쁜 일은 단지 나쁜 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이 그간 짧지 않은 인생에서 배운 일면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사진 1 : https://www.indiepost.co.kr/post/7130

사진 2 : http://www.itworld.co.kr/news/11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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