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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ug 06. 2018

온도가 다른 가난에 대하여

가난이 지겨워 떠나왔지만 가난은 어디에도 있었다


뜨거운 여름이 하염없이 흐르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눈치를 보며 회사에 겨우 대체 휴가를 제출했다. 바쁜 대행사 일을 하면서 주말에 쉬거나 휴가를 눈치 보지 않고 쓴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생각이 들 때는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걸 경험을 통해 느낀 나였기에 무리수를 두었다. 그 시절 나는 잦은 야근과 주말 반납에 꽤나 지쳐 있었다. 이렇게 살려고 내가 호주에서 돌아온 건가?라는 생각을 매일 몇 번이나 할 만큼 나는 컵라면 하나로 연명하던 호주에서의 시간을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변색되었을 땐 이미 찌질하고 지난했던 과거는 증발된 지 오래였다.


 그 시절의 나는 더 견딜 수도,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조금은 세상 밖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5시간 거리의 집에 내려가는 일은 할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기차와 버스 사이에서 손가락이 몇 시간째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버스비와 기차비는 거의 2배가 차이나는 금액이지만 시간도 2배나 걸렸다. 시간조차도 돈으로 사야 하는 도시에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기차표를 예매했다. 고작 옷 한 벌 안 사 입으면 되는 금액을 두고 지질하게 고민을 하는 일도 조금씩 지겨워지고 있었다. 통 크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오는 것일까.







 몇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룰루에 있었다. 손님들과 케언즈에서 8000km의 사막을 달려 서호주로 되돌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중이었다. 겨우 전파가 닿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터지는 핸드폰에는 끊이지 않는 진동 소리와 함께 빨간색 1들이 쉬지 않고 쌓였다. 그리고 그 반가운 소식들 사이에는 엄마가 보낸 물기 어린 메시지도 함께 였다. 할아버지의 비보. 호주로 떠나기 전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하며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할아버지 살아 생전에 나는 번듯한 월급 한번 벌어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했던 기억은 중학교 시절 전단지를 돌리고 받은 돈으로 사드렸던 할머니와의 어설픈 커플 장갑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이따금 할아버지의 병원에 찾아가 시간을 보냈다. 치매였던 할아버지는 때론 나를 기억했고 대게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생전에 좋아하시던 간식을 사들고 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호주로 떠나기 전, 할아버지께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 들렀던 참이었다. 할아버지는 마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하고 계신 것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처럼 우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나도, 엄마도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시간은 잔인하게도 나를 출국날로 이끌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돈도 벌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그곳으로 떠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이 마지막까지 나를 찾으셨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함께 13,000km의 거리를 뛰어 넘어 나에게 닿았다. 나는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해가 질 때마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3억 년도 더 된 돌덩이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 앉아소매로 눈물을 훔쳤을 뿐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던 순간에도 나는 당장의 일과 주머니에 담긴 몇 푼의 동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날의 경험은 내가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는 생각, 나만 생각하며 살아가기엔 나의 우선순위가 온전히 내가 아니었고 내가 추구해 오던 것은 어쩌면 이상과 더 가까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대부분 먹고 살 걱정은 안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깨달음. 4년간 내 청춘을 바쳤던 호주를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고 한국에 돌아왔다. 아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고 조금은 어려웠던 한국행이었다. 헬조선을 떠나 다시 호주에 정착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나를 만류했다. 서른을 앞둔 늦은 나이에는 한국에서 취직을 하기도 정착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호주에 돌아오기 위해 발버둥 치게 될 것이라며 가족의 일은 안타깝지만 결국 네가 행복해야 가족들도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설득했지만 나는 어느새 집으로 가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아빠와의 관계도,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갈등도 풀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왔다. 그것도 코 끝이 얼어붙을만큼 추운 1월의 겨울에 말이다. 뉴스에서는 온통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한파라고 떠들어대고 있었고 나는 순대국밥 집에 앉아 뉴스를 보며 얇아질 대로 얇아진 나의 패딩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하고 온난한 호주의 서쪽 마을에서 오래 지내온 터라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곤 대학생 시절 인터넷에서 대충 사서 입은 철 지난 옷들 뿐이었다. 입을 옷에 대한 선택권이 없던 나에겐 추위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통이 되었다. 초겨울 코트를 입고 함박눈이 오는 몇 날 며칠을 집을 찾아 돌아다녔다. 시중에 들 가지고 있는 50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보증금 500만 원에 구할 수 있는 집들은 언제나 부동산을 찾아가면 금세 나갔다는 말을 듣기 일수였고 '500만 원으로 어떻게 이런 집을 구하냐'는 시큰둥한 대답은 몇 곳의 부동산을 다녀도 똑같이 돌아오는 레퍼토리였다. 합리적인 가격의 집을 구하지 못하니까 부동산까지 온 것 아니겠냐며 성질을 내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말이 맞았다. 서울의 물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주머니 사정만 쏟아내는 건 그들로써는 황당한 일인 것이다. 결국 또 다른 500만 원은 회사에 빚을 지기로 했다. 부동산들은 보증금이 1000만 원이 되자 조금 살만한 환경의 집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타향에서 내 몸 하나 뉘일 곳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난은 뼛속까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와 함께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고 5년 만에 눈 내리는 길을 걷는 일은 처음엔 로맨틱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었다.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고향과는 달리 서울에서는 한 겨울에 스니커즈를 신고 다니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발가락을 주먹으로 꽝꽝 때려도 아무런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괜찮은 집을 얻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 겨울 낙성대부터 서울대입구, 봉천, 신림동을 쥐 잡듯이 뒤지다 결국 신대방까지 밀려왔다. 서울에 이렇게 많은 부동산들이 있는데 왜 내가 지낼 집은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지 너무나 의아했다. 1,000만 원을 모으려면 몇 년을 죽어라 일해야 하는데 이 도시에선 노동의 값어치가 한참이나 평가 절하되어있었다. 동상이 걸릴 것 같은 두 손을 교차하여 겨드랑이에 끼워 넣었다. 서울에서 첫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면서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겨드랑이와 엉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생존에 대한 강연을 한다면 꽤 써먹을만한 포인트라 생각하며 나는 얼른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그것을 정리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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