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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Jan 18. 2018

18불의 셰어하우스와 컵라면

호주에서 보낸 지난한 삶의 기억에 대하여


 컵라면 하나로 하루의 끼니를 대신하던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나에게는 '컵라면'이라는 단어가 유독 슬프게 느껴지곤 한다. 그 시절의 나는 굳이 그런 삶을 선택한 20대 맨발의 청춘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 감각이 소멸된 청춘이었다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하튼 20대의 나는 산티아고의 노란색 화살표가 이끄는 길을 조금 더 걷고 싶은 젊음일 뿐이었다. 조금 고달픈 삶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자던 산티아고의 다짐이 자꾸만 나를 호주로 이끌었다. 그때의 내가 모든 것을 털어 다시 호주로 떠난 것이 올바른 답이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들어가기로 했던 회사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 취업 통보를 들은 후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5개월째 취업 준비생의 모습으로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다. 가족들과 취업을 기뻐하며 외식을 했던 일이 무색할 만큼 나는 초라해져 가고 있었고 그 사이 내가 일을 돕던 회사에서 호주로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냐는 연락을 받왔다. 내가 쓸모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기에 나는 단번에 예스를 외쳤고 호주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힘들어진 회사 사정은 비행기 삯조차 온전히 지원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회사와 내가 절반씩 비용을 부담해 비행기 티켓을 끊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비용을 치르고 난 통장 잔고는 17만 원 남짓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빠는 5개월간 아무런 행동이 없던 회사의 일을 돕는 것에 대해 크게 노발대발하며 반대하셨다. 계약서도 제대로 쓰지 않는 회사에 인생을 거는 무모한 내가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못한 채 부모님과의 갈등 끝에 새벽 4시에 배낭을 둘러메고 가출을 했다. 스물여섯이 된 내가 가출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학창 시절에도 해본 적이 없던 가출을 20대의 어른이가 되어 비로소 강행한 것이었다. 어릴 땐 말만 잘 듣던(?) 내가 어른이 되어 갑자기 반항을 시작한 것이라고 여겼다. 엄마는 몇 날 며칠 아니 내가 호주로 떠나가 있는 몇 년을 울었고 아빠는 나에게 더이상 우리는 가족이 아니라며 소리질렀다. 호적에서 파버릴 테니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도, 아빠라고 부르지도 말라는 것이 아빠가 나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내가 호주에 가 있는 동안 부모님은 애타게 점집도 가고 스님도 찾아가면서 내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를 물으셨다고 했다. 단짝 친구들은 우리집에 찾아갈 때면 눈이 붉어진 엄마를 보기도 했고, 편의점 앞에서 혼자 취해있는 아빠를 만났다고도 했다. 내가 호주로 떠나버린 3년동안 나는 세상 최고의 불효녀이자 때아닌 가출 어른이었다.






 부모님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동안 나는 여러 단기 쉐어 하우스를 전전했다. (물가가 비싼 호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과 방을 나눠쓰는 쉐어하우스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곤 하는데 한 방에 여러명의 사람이 사는 형태의 쉐어하우스를 '닭장 쉐어'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숙박비가 가장 저렴한 쉐어 하우스였다. 세련된 퍼스 도심과는 상반되는 시내에서 가장 낡고 무서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던 아파트, 언제나 그 언저리의 버스 정류장에는 술에 취한 호주 원주민 무리나 문신으로 가득 뒤덮인 얼굴의 사나이,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은 인도 사람들이 저마다의 체취를 풍기며 버스를 탔다. 화려한 도시에 채 적응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오직 그 곳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였다. 화창하고 맑은 날씨가 매력적인 퍼스라는 도시에서 빛바랜 상아색의 낡은 아파트와 그 곳에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보였다.


 그 곳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인이 운영하는 쉐어하우스 역시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벽면에서 쉼없이 돌아가던 선풍기에 쌓인 먼지는 우스울만큼 화장실 샤워 커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물 곰팡이 군단이라던지, 기름 때가 채 지워지지 않는 부엌의 벽면, 해가 들지 않아 퀘퀘한 냄새가 그 집의 특징이었다. 말은 그럴싸한 쉐어하우스였지만 청결이 우선순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돈을 포기하고서라도 금새 뛰쳐나갔으리라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다. 돈에 대한 억척스러움이 말도 안되는 아파트에 철제 2층 침대 4개를 욱여넣고 '쉐어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물론 쥐뿔도 가진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그 환경에 불평할 용기가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 18불에 이 한 몸을 재워주는 곳은 그리 흔치 않았으니 말이다.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나는 그곳의 지저분함에 눈 감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세 달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화장실과 부엌을 기점으로 남자와 여자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던 초반의 상황은 게나마 양반이었고 40도를 웃도는 여름이 다가왔을 땐 여자라고는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언제 청소했는지도 모를 거무죽죽한 곰팡이 샤워 커튼과 누가 언제 닦았는지 모를 누런 변기 그리고 오줌을 눌 때마다 커다랗게 화장실 벽을 울리는 청아한 소리는 나의 쾌변 욕구조차 잠재워버렸다. 하루 18불을 지불하고 생활했지만 3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그 집에서 단 두 번의 쾌변과 잠자는 일 외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더욱이 그 말도 안되는 공간에서 프라이버시와 안전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가방을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집은 자주 활짝 열려 있었고 윗 침대와 아랫 침대의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있었으니까. 그 집에서 내가 단 한 번도 요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부엌에 들어설 때마다 빛의 속도로 숨어버리는 바퀴벌레들의 숫자 때문이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컵라면 생활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고 다들 묻고싶겠지만 관광비자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관광비자를 가진 사람이 생산행위를 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불법이다) 더군다나 3개월 관광 비자의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인심 좋은 사람이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지내왔던 호주의 서쪽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인건비가 가장 높은 곳이었지만 평화롭고 큰 천재지변이 없는 이 곳에서 사람들은 조금 게으르기도 했다. 3개월간 조금 부지런하고 의욕 넘치는 여성을 일시적으로 고용하기보다는 오래 일할 수 있고 기동력이 있으며 체력이 좋은 남성을 더욱 선호하는 건 이 곳에선 더 당연한 일이었다. 1개월이 지났고 내 통장 잔고는 17만 원에서 어느새 12만 원으로 줄어 있었다. 옷 한 벌 사 입지 않았고 커피도 일주일에 한 잔을 겨우 마실 까말까였고 매일 컵라면으로 버틴 삶이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사무실 냉장고에 있던 물도 마셨고 과자 부스러기도 주워 먹었으니 분명 잘 잘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어두운 복도 제일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아파트의 문을 연 순간 내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개의 침대에서 하얀 눈동자를 굴리며 어색하게 두 명의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오늘도 이 집에서 여자는 나 혼자 뿐이구나. 푹 자긴 글렀다'라고 말이다. 처음 만난 두 남자와 합방을 하던 날, 40도 가까이 치솟던 열대야 속 우리의 머리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선풍기는 정말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새로 들어온 두 남자 역시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더니 결국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야트막하게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와 복도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들은 결국 나를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은 그냥 말 그대로 '존나' 서러운 밤이었다. 호주로 기어이 와버린 내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나는 새벽 3시에 베개를 대신 할 담요를 안고 사무실로 향했고 책상에서 엎드려 잠을 잤다. 에어컨이라도 켤 수 있는 사무실에서 대신 셰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함께 사무실을 나눠 쓰는 일본 친구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나는 동이 틀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게 샤워를 하고 마치 고고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출근을 했다.



 기왕이면 일찍 일어난 김에 산책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다 보니 해질 녘이 되면 배고픔을 잊기 위해 달리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하루 한 끼의 컵라면과 배고픔을 잊기 위한 해 질 녘의 달리기라니, 정말 아이러니한 가난뱅이의 삶이 이렇게 시작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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