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라도 - 아헤라
카미노를 걷기 시작한 그 날, 우연히 지나친 기념품 상점에서 카미노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다리'들을 사진으로 전시해둔 작품들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무엇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처럼 그 작품으로 인해 카미노의 모든 다리들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단 한 번도 우연히 그들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매 순간 다리를 지나며 처음 이 다리가 생겨났을 때의 모습과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 이 곳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며 걸었다. 다리는 과거와 현재를 함께 이어주고 있었고 우리는 그 과거와 현재를 유유히 걸어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중이었다.
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밀밭이 나타났다. 내가 유일하게 욕심내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영상을 촬영하며 걸을 때마다 살아있다는 감정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영상들 속에는 아침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언제나 함께 담겼다. 쌀쌀하지만 차가움이 가득한 공기를 코로 가득 들이마실 때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함께 채워졌다. 이런 기분이라면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씩씩하게 내딛는 발걸음과 달리 아침의 밀밭은 바람소리조차 없이 적막하고 또 평화로웠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시야에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내 앞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한참을 그렇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너무도 겁쟁이라 홀로 길을 나설 때면 종종 두려워지곤 했다. '이 길이 아니면 어쩌지?' 혹은 '뒤쳐지면 어쩌지?'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그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먼 길을 끝까지 고집하며 떠나왔지만 이 곳에서도 날 선 모습을 하고 같은 생각에 머물고 있는 내가 오늘따라 한참이나 더 우습게 느껴지고 만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는 날이다.
따스한 햇살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는 벤치를 보니 왠지 노곤함이 밀려오기 시작했지만 약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물집은 퉁퉁 불어 나아질 기미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요 며칠 신발이 바닥에 끌리며 드르륵- 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체력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오늘따라 마음은 부쩍이나 예민해진 상태. 신발도 양말도 모두 벗어던지고 마을 한편에 심드렁하게 누워있는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잔잔한 수면이 순식간에 파장으로 흔들렸다.
참 우습게도 이 길 위에서까지 인간이라는 존재는 경쟁을 멈추지 않는가 보다. 잔잔한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도 앞에 누군가가 보이면 그를 앞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내가 여전히 어리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순결한 이 길 위에서조차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의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누군가에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일어나게 된 것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며칠 전, 이런 마음을 J와 Y언니에게 아주 조심스레 털어놓았더니 다들 그런 마음이 들어왔다며 위로를 건넸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왔다고, 사실 서로에게 그런 말들을 털어놓기엔 치부를 보이는 일이라 생각되어 말을 아꼈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이따금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을 피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구간을 건너뛰기도 했지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저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이 곳을 성스러운 순례길이라 부르지만 누구나 다 길 위에서 성숙하진 못했다. 나를 통해 타인을 알아가는 또 타인을 통해 나를 깨달아가는 그런 길. 걸으면 걸을수록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성숙의 여정이 바로 이 카미노였다.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기에 매일 걸음을 걸으며 나아지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걷던 중 유코와 미사코를 만났다. 유코를 처음 만났을 때는 유난히 뽀얗고 짧게 친 머리 때문에 수녀님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마치 만화에서 금방 나온 것 같은 앳띈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산티아고를 걸은 지 한참이나 지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안녕’이라는 인사가 아닌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곁에서 자박자박 걷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길을 가득 메우다가 마침내 걷는 소리가 같은 템포로 맞춰져 갈 때 즈음에야 말이다. 나는 드디어 말 문을 열었다. 눈이 맑은 그녀가 이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듣고 나는 금세 그녀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가 '아빠'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코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사진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노부부의 사진 그리고 다른 한장은 파란 들판에 놓여진 조각들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에겐 아버지가 계셨어. 너처럼 어쩌면 너보다 더 엄한 아버지셨지. 너도 알다시피 우린 문화가 비슷하잖아? 나에겐 오빠와 남동생이 있고 유일한 딸인 나에 대한 걱정이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더 짙으셨어.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외박 한번, 밤 9시 이후로 들어오는 삶은 꿈꿀 수가 없었지. 그런 아빠가 너무 싫어서 어느 순간 반항을 하게 되었고 그런 나에게 돌아오는 건 손찌검이었지. 어쩌면 너처럼 나도 이렇게 상처 받은 거야. 어른이 되고 독립을 해서도 나는 오랫동안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어 너처럼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 엄마는 무척이나 슬퍼하셨고 물론 나도 그랬었지. 왜냐면 아빠는 2009년과 2011년에 엄마와 함께 이 곳 순례길을 걸을 만큼 건강하셨거든. 물론 휴가가 허락하는 시기 동안 구간별로 말이야. 나는 아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오빠와 남동생을 통해 들었지만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에 굳이 아빠를 찾아 가진 않았어. 설령 병원에 가더라도 잠시 곁에 앉아 말없이 자리를 지키다 오는 것이 다였지. 사실 오빤 지금 캐나다에서 법을 공부하고, 남동생도 회사를 잘 다니며 돈도 잘 벌고 있지만 나는 그저 그런 직장인이었어. 콤플렉스와 아빠에 대한 미움이 뒤엉켜 나는 아빠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저 그런 삶에 싫증이 났지만 나는 천주교인이라 손목을 긋는 일은 상상으로만 그치고 말았지."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의 전화를 받았어. 그 목소리엔 물기가 잔뜩 서려있었지. 그리고 나는 예상했어. 그렇게 아빠는 떠나셨고 나는 더욱 집에 가지 않게 되었어. 아빠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의 전화가 왔어. "누나, 이제 아빠를 편히 보내드려야 하지 않겠어?"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후 성당에서 매일 기도를 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아빠를 받아들이게 된 거야.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야 아빠를 위해 그리고 아빠를 대신해서 산티아고를 완주하기로 마음먹었어. 아빠는 이 곳에 두 번이나 오셨지만 일 때문에 구간구간 끊어서 걸으시느라 완주하진 못하셨거든. 그래서 난 이 곳에 아빠와 함께 왔어."
그녀는 복대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작은 주머니에는 아버지의 뼛조각이 들어 있었지만 이미 우리 둘의 눈은 눈물범벅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위해 마음으로 울어본 기억이 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 순간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멈춰 서서 서로를 마음으로 따스히 끌어안았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뿐이었으니까.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이 순간을 계기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친구가 되었다. 항상 미사코와 함께 하던 유코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오늘은 참 좋은 날이라는 말과 함께 본인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어서, 아빠를 축복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에겐 다시 눈물을 닦아내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고 나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다시 서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도 나는 그녀를 생각하며 몇 번이고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기를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을 쏟아낼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산 하나를 따라 길이 이어지고 있었고 둔턱 어귀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절뚝거리며 걷고 있던 H는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반갑게 손을 흔든다. 산 중턱에서 숨을 고르며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수 백 만리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난다. 좋은 풍경을 보면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나에게는 그 소중한 존재가 여전히 가족들이다.
오늘은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 날이다. 이런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의 뒷꽁무니만 따라가면 되기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하루 반나절 동안 철저하게 지독한 고독 속에서 걸어야 하는 날도 어김없이 오기 마련이다. 요 몇 일간을 외롭게 홀로 걸어와서인지 오늘은 앞서 걷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따라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늘도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나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한 위로와 안도감을 얻는다.
오늘은 산을 건너다 눈에 띄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 점심을 청했다. 유코와 미사코가 미리 귀띔을 해준 덕분에 가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점심을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무거운 것들을 들고 다니면 배낭 무게로 어깨가 아파오기에 최소한의 것들을 꾸리고 다니는 가방 속에는 어제 먹다 남은 빵 한 조각과 크림치즈도 함께였다. 주섬주섬 먹을 것을 꺼내 배를 채우다 길을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시금 저 따가운 햇살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순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내 곁에 놓인 토르티야와 빵 한 조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잠시 멈춰 숨을 골랐던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책에선 이 곳에서 쉬어가길 청하고 있었지만 잠시 그늘에 앉아 콜라를 한 캔 마시고선 다시 길을 걷기로 조심스레 마음먹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오늘 이 곳에서 여정을 푼 한국인 어머님과 W 그리고 S를 만났다. 홀로 이 길을 걸으러 오셨다는 어머님이 너무나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 생각처럼 어머니는 대단하신 분이었다. 딸들이 모두 시집을 가고 적적한 중년의 시간을 보내던 중 카미노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셨단다. 모든 가족들에게 중대 발표를 하고 떠나겠다 했을 때 모두가 반대를 했지만 결국 결혼한 따님들이 용돈을 모아 어머니의 비행기 티켓과 용돈을 마련해주셨다고 했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아프다는 티 하나 못 내고 몰래 병원에 다녀오신 어머님은 꽤나 깨어있는 어른이셨다.
어머님과 오래오래 이야기를 하던 중 어머님은 부모 입장의 이야기를 건네셨다.
"밖에선 회사에 고개 숙이고, 집에선 가장이란 이유로 작아지고, 친구들 앞에선 아직 취업하지 않은 자식 때문에 작아지고.. 그렇게 한없이 작기만 했던 아빠도 집에서나마 큰 존재이고 싶었을 텐데 그조차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아빠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때렸다'는 사실에 집중하지 말고 '왜 그러셨을까'에 집중해 보아요. 그리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혹시 그게 욕심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요? 나는 지금도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빠와의 갈등만 잘 풀어낸다면 나는 확신컨대 이분 씨가 큰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해요"
오늘은 길 위에서 참 많은 위로를 얻었다. 누군가를 위해 눈물 흘리며, 누군가가 나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줄 때 그리고 그 허한 마음 곁에서 누군가가 동행하며 작은 발자국 소리로 공백을 채워줄 때마다 말이다. 그것들이 어쩌면 내 인생의 노란 화살표가 아니었을까. 노란색은 그리움의 상징이라더니 어쩌면 그리움과 함께 따스함도 함께 가지고 있는 색이 아닐까. 오늘은 참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는 날이다.
사람들이 모두 알베르게에 짐을 푼 시간, 길 위에는 오직 H와 나의 그림자만 나풀댔다. 유난히 반짝이는 날씨에 H도 나도 말없이 마음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이따금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들판에 벌러덩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눈을 감으면 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이따금씩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이 공간에서 아마 나는 제일 여유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몇 번을 살까 말까 망설였던 노란색 트레킹화는 이제 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신발을 사길 잘했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건 카미노를 상징하는 노란색 화살표와 내 신발이 너무도 닮아서,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노란색 화살표처럼 길을 알려주는 역할의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오늘은 문득,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이 멀고도 먼 나라를 내 두 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가슴 벅찬 날이다.
들판에 드러누워 H가 멀어져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괜찮은 사람일 수 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어머님의 말씀처럼 이 길을 걷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빠를 먼저 이해하고 마음을 여는 일일 거라고. 그것이 내가 이 아픔을 털어내기 위한 가장 우선순위의 일이라고.
이 시간의 알베르게는 꽤나 한가롭고 따스하다. 샤워를 끝내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빨래가 말라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건 무척이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임에 분명하다. 침대에 엎드려 일기장을 끄적거리는 일, 그리고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일. 이 모든 좋아하는 것들이 이 길 위에서는 언제든 가능해진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매일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었다. 나의 아픔을 나누고, 누군가의 아픔에 기꺼이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다시 오롯이 나만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6월 5일
가이드북 한 권과 일기장 그리고 순례길을 걸으며 받은 영수증과 편지가 담긴 비닐 한 장, 다른 어느 때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보는 순간이다.
직장생활 2년 차, 3년 차의 친구들과 이상(꿈)을 찾아 떠나온 나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나 불안감이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물었다. 물론 그럴 때가 있었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과연 이게 옳은 길일까를 수도 없이 생각하는 상황들 말이다. 부모님이 기대하셨던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쯤은 크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돈도 벌고 부모님 신발 한 켤레라도 사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서른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문득 외로워질 거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하게 뒤늦은 사춘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나는 남들보다 이른 사춘기를 맞고 있는 거라고 믿는다. 몇 번이고 더 마주하게 될 혼란의 흐름 속에서 더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