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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30. 2024

2-5. 누에치는 사 대 여성 가장

엄마의 사계절

한재는 산과 들과 바다를 품었다. 뒤로는 소오산과 큰설산이 사천왕상처럼 어깨를 나란히 버티며 섰고 앞으로는 호수처럼 아늑하고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물구멍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삼복골 허리를 휘감고 오래된 전설처럼 돌돌돌 조잘거리며 바다로 흐른다. 


산기슭 아래 허리쯤에 층층이 우리 다랑논이 이어진다. 하얀 찔레꽃이 피기 전 모내기를 시작하여 찔레꽃이 한창일 때 끝난다. 모판에서 모종이 어른 한 뼘이나 자라면 덩이덩이 묶어 물이 찰랑찰랑 찬 논에 던져 놓고 모내기를 시작한다. 바짓단을 동동 감아올리고 여남은 남녀 어른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일제히 논바닥으로 허리를 꺾어 숙이고 모를 심는다.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내아이나 잔심부름하는 꼴대미가 못줄을 잡는다. 어른들이 제각각 모를 서너 포기씩 심고 구부렸던 허리를 펴면 논 양쪽 끝에 서서 ‘어이~!’라는 구령에 맞춰 못줄을 넘기는 풍경을 보며 뻐꾹새 우는 봄을 살았다. 


엄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일꾼들 점심과 새참을 꼬박꼬박 날랐다. 모를 심다가도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한 시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목고개가 꺾이도록 못밥을 이고 왔다. 대나무 광주리에는 소복소복 담은 밥이랑 반찬이랑 마실거리가 가득하다. 그릇은 이른 아침에 일꾼 지게에 미리 갖다 부려놓고 때맞추어 먹거리를 날랐다. 할머니가 그나마 기운이 있을 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거들었지만 점점 쇠약해지면서 그마저도 엄마 몫이었다. 아주 옛날에는 못밥을 담은 그릇으로 대나무로 엮은 대그릇을 썼는지 작은 부엌 모퉁이에 줄줄이 엮어서 걸어놓은 걸 봤지만 사용한 적은 없었다. 장식처럼 걸렸던 대그릇도 증조할머니 눈길따라 옮겨다니다가 사라졌다. 


그 시절 새참은 보리개떡이나 국수가 대부분이었고, 차츰 끓이기 쉽고 새로운 문물인 라면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남자 일꾼 새참으로 막걸리는 빠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동네 앞 농협 구판장 이 층 동사에서 스피커로 알리셨다. 


“팔 통 삼 반에 사는 은주는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동사로 오니라. 다시 한번 알린다. 팔 통 삼 반에 사는 은주는 막걸리 두 되짜리 주전자를 들고 빨리 구판장으로 내려 오니라. 이상 끝.”


마지막 말씀 끝에는 헛기침까지 빠트리지 않으시며 마이크 끄는 소리로 마무리하셨다. 온 동네를 울리는 할아버지 음성이 처음에는 존재감이 있고 귀하게 여겨졌으나 차츰 나이가 한두 살 많아지면서 쑥스러운 일이 될 때쯤 할아버지 그런 장난기 어린 놀이도 시들해지셨다. 


심은 모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꿋꿋이 잡기도 전에 뿌리고 거두는 농촌일은 쉼이 없었다. 봄바람이 살풋 더운 공기를 머금으면 할머니는 뽕밭으로 시선을 옮기셨다. 뽕잎이 연둣빛 잎을 틔우면 할머니는 누에를 치셨다. 깨알보다 작은 씨앗에서 새끼 누에가 깨어나고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녀석들은 쑥쑥 자랐다. 까만 점에서 하얀 누에로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은 마법에 걸린 것마냥 신기했다. 


잠실(누에를 키우는 방)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안방 전체를 누에방으로 꾸미고 삼단 혹은 사단, 오단을 양쪽으로 누에집을 차렸다. 할머니는 그 사이 통로에 주무셨다. 어린 누에는 뽕잎을 잘라서 주다가 중간쯤 자라면 통잎으로 주었다. 자고 나면 뽕잎은 모두 사라지고 까만 누에똥만 까뭇까뭇 흘러 있었다. 그러곤 새끼강아지가 색색거리며 자듯이 일제히 깊은 잠을 잤다. 배가 고프면 다시 깨어나 뽕잎을 찾아 사각사각 열심히도 먹었다. 한 잠, 두 잠, 석 잠. 할머니는 그때를 정확히 아셨고 엄마는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싱싱한 뽕잎을 따다가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서 할머니께 드렸다. 비라도 올라치면 고부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땐 미리미리 뽕잎을 따다가 하루치 정도는 비축해 놓았다. 싱싱하지 않거나 시들한 잎을 누에는 먹지도 않았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누에를 키웠고 할머니는 밤낮으로 같이 지내며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아낌없이 돌보았다. 어쩌다가 바닥에 떨어진 녀석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누르스름한 빛을 띠며 비실거리는 녀석을 보고도 ‘너는 안 되겠다’거나 ‘며칠 못 가겠다’라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말귀를 그대로 알아듣는 누에는 사람이 내뱉는 말대로, 들리는 말대로 살았다. 시들해 보여도 ‘힘내면 살 수 있다’거나 ‘아이 예뻐라, 잘도 먹는구나’라고 칭찬하면 그대로 힘을 내고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누에를 하늘에서 내린 벌레라는 뜻으로 ‘천충(天蟲)’이라고 했다. 


그만큼 할머니와 엄마는 누에를 귀하게 대하였다. 누에고치로 명주실을 얻는 소득원이 되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생명을 소중히 다루고 보살피는 손길은 사람이 먹을 음식을 다룰 때보다 더 곱고 다사롭게 빛났다. 양잠은 뽕나무 열매 오디가 열리기 전까지만 했다. 오디가 열린 뽕잎은 영양가가 없고 누에도 먹지 않았다. 넉 잠을 자고 다 자란 오령 누에는 하룻밤 사이에 입으로 실을 끊임없이 자아내어 눈송이보다 더 뽀얀 은빛 누에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세상과 이별하는 누에의 모습에서 오래전 이미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만 같다. 


누에를 그대로 조합에 매상하기도 하고 미지근한 물에 담가서 명주를 물레에 걸고 명주실 타래를 만들기도 했다. 집에서 실을 뽑으면 더 고가로 계산해 주었기에 집에서 시도하다가 실패를 한 번 하고는 두 번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실을 다 뽑고 나면 번데기가 누워있었지만 한 생명이 씨앗에서 자라나고 주검이 된 과정을 다 목격했던 나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회지에선 번데기를 고단백 간식이라며 먹는 걸 보며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의아했다. 


증조할머니는 모시 농사를 지으셨다.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펼 생각도 없이 모시밭을 돌보고 일꾼을 시켜 모싯대를 찌고 묶어서 날랐다. 수레도 없이 집 뒤 모시밭에서 질질 끌어다 집 안 또랑에다 담가두었다가 껍질을 벗기고 모시를 삼았다. 거북등 같은 구순의 주름잡힌 손과 손톱 사이로는 거뭇거뭇 모싯물이 들었다. ‘죽어지모 썩어질 몸’이라는 증조모 음성이 그대로 새겨진 모습이다.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는 일은 엄마가 시집온 이후 한두 해만 하다가 없어진 풍습이다. 

한여름 뙤약볕이 익어 따끔거릴 즈음 들판은 황금 물결이 일렁인다. 벼 나락이며 콩, 깨 가을걷이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라치면 솔개밭으로 간다. 솜털 하얀 목화가 팝콘 터지듯이 부풀어 터져 오르면 고랑고랑 망태를 차고 다니며 목화를 딴다. 하얀 한복에 머리도 흰 할머니가 목화밭에 서면 목화인지 할머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탐스러운 목화를 광주리에 가득 따서 며칠을 두고 날랐다. 목화는 씨앗을 잣고 물레를 돌려 실을 뽑기도 하고, 솜을 탈탈 타서 이불솜을 만들기도 하고, 조합에 팔기도 했다. 할머니가 기운이 있을 때는 같이 하는 일이지만 한 해 두 해 다르게 힘이 노쇠해지자 그것도 엄마 혼자 도맡아 수확해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같이 거들기도 했지만 인건비가 오르면서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해결해야만 하는 밭일은 늘어만 갔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한재는 겨울에도 일거리는 있었다. 조개 캐는 바깥일을 안 시키는 옛 풍습대로 엄마는 한동안 집안일만 하셨다. 하지만 그 시절 귀한 소득원이었던 백합 양식장에는 같이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그 백합을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일도 하고 할아버지 찬거리도 마련하는 일석이조를 엄마는 놓칠 리 없다. 양식장 백합이 외부로 유출되는 건 금지되었지만 조합에서 감독하는 동네 아재는 할아버지 안부를 물으며 더 챙겨서 넣어주더라는 엄마 회고는 고마운 마음으로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우리 집 굴섶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일꾼들이 지게로 한두 번은 굴을 실어다 날랐다. 시원한 곳에 굴을 따다가 가마니로 덮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쪼시개로 껍질을 까서 반찬을 했다. 국도 끓이고 초무침도 하고, 굴전과 굴국밥도 차릴 수 있는 겨울철 요긴한 찬거리다. 


한때는 광산업자가 동네를 휘젓고 들어와 일감을 만들기도 했고, 부녀회에서 홀치기 염색일을 집집마다 안기기도 했다. 먹거리는 대부분 자급자족하는 시골 농촌이다. 논농사, 밭농사가 대부분이었던 시대에서 외지인들이 들락거리고 지붕개량이나 수도시설이 따라서 들어왔다. ‘조국 근대화’로 벽지 농촌도 모습이 바뀌어 가던 시절, 치솟는 인건비에 건실한 남자 일손 하나 없이 일꾼들 손만 의지하던 우리 집은 점점 더 가세가 기울어 갔다. 


소용돌이처럼 급변하는 근대화시대에도 젊은 엄마는 어른들을 모시고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인생의 진이 다 빠지고 하얀 서리로 남은 어른들과 어린 딸로 구성된 돌봄 소대를 홀로 이끌며 꿋꿋이 챙겼다. 전쟁통에서 진두지휘하는 불굴의 용사처럼 근대화라는 포탄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힘을 내고 버텼다. 때로는 퇴로를 모색하고 때로는 진격하거나 돌격하는 푸르고 고운 엄마의 사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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