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하는 고백 -2-

내 엉덩이에 당신 지분은 없어

by 감주

생방송을 잘 마쳤습니다.

저의 엉덩이를 만진 그분과 함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방송을 잘 마쳤습니다.

홈쇼핑은 '매출이 인격'인 곳이고, 1분당 얼마를 팔아야 한다는 방송 시간 대비 매출 목표액이 있습니다. 그걸 달성률이라고 부르는데 그날은 달성률이 어땠는지, 방송이 완전 망했는지 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머릿속은 어쨌건 사고 없이 방송을 잘 마쳤다는 안도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켜버린 복잡한 마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거든요.


왠지 그 일에 대해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미 아이가 있는 유부녀고 그걸 뻔히 아는 사람이 나한테 왜 그랬지?

본인도 결혼을 해서 갓 태어난 아이도 있는 분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나저나 나는 왜 그렇게 무기력했던 거야? 싫으면 싫다. 하지 말아라 라고 그때 강하게 얘기했어야 했나? 왜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지?


그나저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남편에게.. 말해야 하나?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일인데, 무슨 심각한 성범죄도 아니고 엉덩이 한번 만진 것뿐인데 그걸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이 얘기를 꺼내면 그 사람이 화를 낼 것 같았습니다. 기분 나빠할 것 같았습니다.

자기 부인의 엉덩이를 만진 사람이 뻔히 TV에 나온다고? 같이 일을 한다고?


'그럼 일 하지 마' '당장 그 일 그만둬'


백 퍼센트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얻은 일인데, 이런 일 때문에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대신 그분과도 함께 방송하는 다른 친구에게 이 일을 털어놨습니다.

어느 날 밤, 지하철 역 앞 출구 계단 앞에 나란히 서서.. 회사 사람들이 혹시 근처에 지나다가 들을까,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그 선배님 있잖아. 너도 친하잖아. 근데 보통 너 대기실 있을 때 그분이 막 안에 들어오시기도 하고 그래?"

"아니,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되게 깍뜻하잖아 사람들한테. 방송 끝나고는 밥 한번 먹어본 적도 없는데.."

"그래? 그럼 나한테만 그러는 건가?"

"뭔데, 뭔데.. 무슨 일이야? 언능 말해봐. 완전 궁금해. 무슨 일인데?"

"아니, 나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들어오셨어. 뭐 잡담하고 뭐 그러잖아. 방송 들어가기 전에 긴장 풀고 뭐 그랬는데.. "

"그랬는데?"

"내 엉덩이를 만졌어"


그 친구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저래서 이랬어.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바보같이 아무것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근데 이거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너한테는 안 그래?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어, 나한테 그분이 그런 적은 없으셔. 대기실에 온 적도 없고. 근데 너 참 고민되겠다. 이해가 돼. 네가 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 근데 어쩌겠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그 사람은 메인이고 우리는 뭐.. 말이 돌아봤자 우리한테 득 될게 하나도 없잖니. 그때 그 언니 일만 해도 봐봐. 고민되겠다. 네 맘 이해해."


우리에게는 힘이 없잖니. 그 사람이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계속 같이 방송해야 할 거고. 그럼 누구 손해겠어. 고민은 되겠지만 그냥 넘어가야지 뭐 어쩌겠어.라는 게 그 친구의 조언이었습니다.


몇 달 전 들은 얘기에 의하면, 같은 홈쇼핑에서 방송하던 한 언니가 상부에 피디님 한 명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회식 자리에서 그 피디님이 그 언니 허벅지를 만졌다나. 그 피디를 징계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겁니다. 용감하기 이를 데 없는 언니 아닙니까. 그런데 돌아온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오히려 이 언니가 홈쇼핑 내에서 애먼 사람 잡는 돌아이가 되어 버렸던 겁니다. 그 피디는 본인은 회식 자리에서 그런 행위를 한 바 없다 라고 상부에 주장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여자가 무고한 자기에게 없는 일을 덮어 씌우는 거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죠. 그리고 회사는 당연히 아무 징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언니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방송을 하러 회사에 들어올 때마다 카메라 빨간 불 보다 더 따가운 스태프들의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죠.


저는 그 현장에 없었고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그 언니의 말을 덮어놓고 맞다 라고 편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언니가 무고한 사람에게 없는 성추행을 끼얹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건조하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피디는 그 회사의 정직원이었고, 권력 구조상 힘도 센 사람이었거든요.

반면에 그 언니는 방송 한 시간 한 시간 돈을 받는, 일명 파리 목숨. 프리랜서였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땐, 그냥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십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그 엇비슷한 일을 겪고 나니, 새삼 그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여 마음속으로 '그 피디 님하고 나도 회식 한번 한 적 있는데. 그분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 언니가 괜히 오버했던 건 아닐까'라고 일견 생각했던 건 아닐까 하고 나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의 내 경우를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언니의 얘기를 전해 들었던 그때의, 메마르고 건조했던 나의 모습이지는 않을까.

뒤에서 수군거리고 삿대질하던 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할까. 없던 일을 꾸며내 한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게 수작 부린다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는 않을까.


잘못은 그분이 했지만, 고민은 결국 나의 몫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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