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하는 고백 -1-

평범한 방송인, 왜 퇴사를 결심했는가

by 감주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했거든요.


기억을 더듬어 4년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저는 홈쇼핑에서 방송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이도 한명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방송일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학교 다닐때 방송반을 했었고, 문제집을 풀다가도 지난 밤 보았던 사극의 대사들을 언뜻 따라하며 나도 방송하면 잘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의 조각들을 가지고만 있었던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방송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거야. 내가 무슨 방송을 한다고 그래. 내 피에는그런 재능은 없어. 그냥 전공이나 따라가' 라고 생각했던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방송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29에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가 생겨 내나이 30에 출산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 결심한 일입니다.

16시간을 진통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 최초로 죽음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 본 시간이었습니다. 양수가 터지고 배는 아프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데 자궁문은 2cm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진통하고 간신히 아이를 낳고 기르게 되자 그제서야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 되던 안되던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쇼호스트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평일은 아이를 봐야 하니까 남편이 아이를 볼 수 있는 토요일 주말반에 등록해서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꼬박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실습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오디션을 수없이 봤지요. 그렇게 시작한 홈쇼핑 방송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기회였는지 모릅니다.


그 좋아하고 가슴 설레던 방송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홈쇼핑을 보다 보면 한시간 방송에 2명의 쇼호스트가 짝을 이뤄 방송하는 것을 쉽게 보실 수 있을겁니다.

한시간 방송의 흐름을 책임지고 기둥을 잡아주는 메인 쇼호스트가 있고, 중간 중간 메인의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멘트가 비지 않게 쳐주고, 서브 역할을 하는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서브였고, 그분은 메인을 담당하는 1기로 입사한 하늘같은 선배님이셨습니다.


방송 2시간 전에 미리 스탠바이를 하고 헤어, 메이크업을 받습니다.

방송 1시간 전에는 스텝들이 모여 방송을 준비하는 스텝미팅을 하지요. 스튜디오에는 30분 늦어도 20분 전에는 가서 방송을 준비해야 합니다. 스텝미팅 후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 나에게 주어진 고작 30분.

저는 그 시간에 대기실에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혼자서 거울을 보며 의상을 체크하기도 하고, 발성 연습을 하면서 긴장을 풀기도 하고 멘트를 입에 붙이기 위해 빨리 말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죠. 오늘은 헤어가 잘 됐네, 의상이 맘에 드네 하면서 연신 셀카를 찍기도 하구요


그런 평범한 일상 중의 하루, 그 선배가 대기실에 찾아오셨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방송한다. 그간 잘 있었어?" 반가운 인사와 함께 악수를 나누고 허그를 했습니다. 의례 편한 사이끼리 하는 그냥 예의 그런 인사말이예요.

짧은 담소를 나누고 "이따 보자" 라는 말과 함께 그분은 대기실을 나갔습니다. 생방송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도 한번 들리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스튜디오에서 방송 준비를 했겠죠. 그날도 그렇게 우리는 호흡을 맞춰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습니다.


얼마 뒤 그분과 방송 할 기회가 또 있었습니다. 대기실에 찾아왔고, 또 반갑게 인사하며 가벼운 허그를 하고 잡다한 일상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걔 요즘 잘 안보이던데 혹시 본 적 있니?" "요즘 회사에 이상한 소문 돌던데, 그거 뭐예요?" "나 어제 밤에 한 방송 완전 말아먹었자나. 달성률 40프로 나왔다. 하하"


'이제 슬슬 방송 준비하러 나가봐야겠다'하고 생각했을 때 그분도 나가서 준비할 시간임을 인지했던 터인지 "그럼 조금 있다 보자" 라고 말하며 가볍게 허그를 했습니다. 거기까지였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그랬을텐데 그 평범한 일상은 그렇게 흔들렸습니다.

가볍게 허그를 한 상태에서 그분의 두 손이 제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습니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짓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인생 처음 겪는 일이여서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배운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보통 이럴 때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는 표현을 쓰던데, 오만가지는 커녕 다섯개의 생각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저는 30분 뒤면 그분과 전국 생방송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만약 그 자리에서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무슨 짓이냐고 펄펄 뛰어서 문제라도 생기게 되면, 혹여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분이 언짢게 되면 안되는 거자나요. 내가 그분을 그렇게 만들면 안되는거잖아요.

저는 서브를 담당하는 사람이고 방송이 코 앞이니까요.

저는 프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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