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븐,1995] 묵상
영화 [세븐]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서머셋 형사(모건 프리먼 분)는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밀스 형사(브래드 피트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자네가 그를 쏘면, 자네가 지는거야."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제목과 연관된 일곱 가지 살인의 방식이 매우 잔인하고 엽기적이어서 보기에 상당히 불편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 하긴, 데이빗 핀처의 영화 치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긴 합니다. - 저도 오래전 처음 봤을 때엔 보고 나서도 영 개운치 않은 음울함에 빠지게 되어 좋은 인상으로 남지 않았었지요.
다만 그 치밀한 각본과 구성은 정말 탁월하여 몰입감이 대단하다는 인상은 남아있었습니다. 그런 영화를 시간이 많이 지나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저는 이 영화가 신앙적으로 매우 귀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밀스 형사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을 마주하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Oh, GOD!"을 반복해서 외칩니다. 그러다가 이어진 결말은 범인의 의도대로 되어버려 마치 진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이 느끼는 허탈감과 비참함은 그 패배감 때문일 것입니다. 범인은 치밀한 함정 속으로 주인공들 – 사실상 영화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 – 을 끌어들였고, 계획대로 모두가 그 함정에 빠져서 쓰러져버린 셈이었습니다. 범인은 모든 사건의 종결까지도 본인의 계획대로 실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범인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부분만 봤을 때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죠.
결말에서 범인의 삶은 끝이 났고 그에겐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아직 삶이 남아있습니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견 악이 승리하는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결국 악은 패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래 악은 그렇게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여기고 그들의 악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비참한 좌절감을 주면서 악에 굴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에서 아나킨이 다스베이더로 화하는 장면이 그 부분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패배하여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부분을 착각하고 있는데, 실은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무엇의 시작과 끝은 오직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악도 그것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다만 악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 사실을 숨기고 인간을 속이려 들 뿐입니다.
밀스 형사는 당장은 패배한 자이지만, 아직 살아있는 그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며 변화하고 또 성숙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상태로 그대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될 확률만큼 시련을 딛고 굳건히 일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가능성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가능한 소망입니다. 악으로 대변되는 범인은 죽어버렸기에 확실히 거기까지로 끝이 났습니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변화의 가능성도 제로입니다. 누구에게 여전히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는지는 자명합니다.
사실 서머셋 형사는 은퇴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서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련함을 알고 있던 경찰서장의 강권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경찰서장은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밀스를 차에 태워보내는 서머셋 형사에게 어디로 떠날 것인지 묻습니다. 얼마전까지 일을 그만 하려던 서머셋 형사는 의외로 멀리 가지 않고 머물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레이션이 나오며 영화가 끝납니다.
“헤밍웨이가 말했다. ‘세상은 멋진 곳이고, 싸워서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난 그 말의 뒷부분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은 아름답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많습니다. 밀스 형사는 가족도 멘탈도 모두 잃었습니다. 서머셋 형사도 그 오랜 세월을 형사로 근무하며 얻은 정신적 고통의 양이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싸워볼 가치가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그런 소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악의 결국은 언제나 죽음입니다. 때로 악은 다른 모든 것의 죽음으로 생존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엔 악이 관영하여 과연 소망이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께서는 힘도 없고 하찮게 보이고 악에게 시달려 철저히 패배한 것 같은 인생을 여전히 살아남게 해 주셔서 그 안에 소망을 심어두십니다. 대부분의 소망은 대단하고 화려한 것에 있지 않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지도 모르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힘을 발하고 모습을 드러낼 때는 어떤 악도 그것을 감히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힘으로 지금껏 이어져 왔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말 꽤나 성경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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