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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야 Nov 07. 2019

우리 아이 그런 표정은 처음이야

제1장 나는 그저 네가 밝고 행복하게 자라길 바랄 뿐이었는데..

내가 아이의 공부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야겠다고 느낀 것은 유치원 참관 수업에서 보인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아이는 5살, 6살 때까지만 해도 국공립 유치원에 다녔다. 그러다가 7살에 맞춰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 근처로 이사를 갔다. 유치원도 사립유치원으로 바꿨다. 아이가 유치원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그대로 초등학교도 함께 갔으면 좋겠단 생각에 미리 움직인 것이다.  


아이가 7살부터 다니기 시작한 유치원은 나름 초등학교에 대비해 공부를 시킨다고 소문이 난 유치원이었다. 유치원마다 다르겠지만 아이는 국공립 유치원을 다니면서 한글조차 떼지 못했다. 유치원을 옮기면서 아이가 헤맬까 걱정됐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을 옮기기 전이었던 6살 후반쯤에 아이에게 퇴근 후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두 세 달 만에 한글의 80~90%를 읽게 됐다. 나로선 한숨을 돌린 셈이었다. 그 뒤론 아이가 잠들기 전에 책 몇 권 읽어주는 것을 제외하곤 아이의 학습 등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아이는 유치원을 새로 옮겼지만 수월하게 적응해나가는 듯 했다. 사립유치원을 다녔던 초반에는 “활동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말하는 활동에는 발레, 바이올린 등을 포함해 영어, 수학 등 직접적인 공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을 사귀면서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할 정도의 거부감은 없었다. 나는 우리 아이의 적응력을 높이 사며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러한 나의 믿음이 산산이 무너진 것은 5월말쯤이었다. 유치원에 새로 들어가고 두 달여가 지나 참관수업을 했다. 남편과 나는 휴가를 내고 유치원으로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았다. 영어 수업 시간이었는데 아이 또래 친구들이 `I'll read my books in the bedroom`과 같은 영어 문장을 술술 읽어 내려갔다. 일부 아이들의 특출난 실력이 아니었다. 20명의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 아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이 헤매지 않고 정확하게 문장을 읽었다. 생각지도 못한 또래 친구들의 실력에 놀라기도 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 아이의 표정이었다. 집에선 항상 자신감 넘치고 신나게 노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 나는 아이에게 `놀이꾼`이란 별명까지 붙여줬었다. 그런데 그 영어 수업 시간에 우리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몹시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많은 아이들 중 우리 아이 모습만 유난히 도드라져보였다. 아이에게 이 영어 시간은 너무 힘들다 못해 고통스러워보였다. 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겉으론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어 수업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이든, 두 번 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 시간으로 인해 유치원에 가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영어가 싫다`느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한글 뗐으면 됐지`란 안도감에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게 후회됐다. 더구나 나름 학군이 좋다는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7살 때 초등학교 근처로 유치원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아이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잠깐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에 대한 걱정도 밀려들었다. 그냥 국공립 유치원에 다녔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초등학교에 가서 적응이나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이는 아이의 몫이겠지만 사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릴 때 아이의 학습은 결국 좋든 싫든 엄마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편도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를 향해 “적응 못하면 어떡해. 잘 할 수 있겠어?”라며 이 일들을 내 몫인 듯 얘기했다. 마치 내가 힘들다고 하면 “거봐”라고 말하며 일어나지 않은 아이의 학업 부진을 내 탓으로 돌릴 기세였다. 


나는 그래도 아이의 학습에 아예 무관심한 엄마는 아니었다. 아이가 4살 때 한글과 영어 방문 교사를 들인 적이 있었다. 그냥 아이가 “엄마, 이거 무슨 글자야?”라고 한 마디 물었는데 나는 그게 한글에 대한 관심이라고 크게 착각했다.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그냥 알파벳 하나 물었을 뿐인데 엄마인 나는 ‘태교할 때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글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네’라며 방문교사에 돈을 썼다.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일주일에 한 번 15분, 30분씩 하는 방문교사의 학습 지도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1년 정도 했는데 아이는 또래보다 한글을 몰랐다. 나는 방문 교사를 부른다는 위로감과 안도감에 취했다. 그로 인해 아이의 한글이나 영어 공부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는 퇴근 후 피곤했고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데 집중했다. 아이의 학습까지 봐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방문 교사를 통한 학습이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방문 교사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학원에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공부를 시키게 된 이유가 `영어`이고, 영어 공부는 꾸준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이에게 어떻게 영어를 노출시킬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시간은 내가 퇴근해서 밖에 없었다. 아이의 참을성과 나의 피로감을 고려해 그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았다. 나는 퇴근 후 아이에게 매일 30분씩 공부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7살 아이에게 길면 길지만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다. 


관건은 아이가 얼마나 엄마와의 공부를 잘 따라줄 것이냐다. 아이가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기 싫어질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계획들을 아이에게 말했고 아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아이 스스로도 영어 시간마다 위축됐던 자신의 모습이 꽤나 괴롭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이의 한글을 가르쳐줬던 경험으로 아이에게 용기를 줬다. 이런 말만으로도 아이는 위로를 받는 듯 했다. A, B, C, D도 제대로 모르던 아이가 긴 문장을 읽으려니 오죽이나 막막했을까 싶었다. 이런 고충들을 왜 나한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아이한테 물어보니 아이는 “그것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 했어”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놓치고 지나가는 부분도 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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