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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09. 2019

4-6.  추방당한 남자.

이민자가 캐나다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추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주의 경고’ 같은 것이다. 누가 무슨 범죄를 저지르고 추방당했다더라, 추방당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출국하는 것이 좋다더라, 하는 얘기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캐나다에서는 범죄 저지르지 않고 조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토론토 신문에 대서특필된 기사가 하나 있었다. 두 남성이 옆집 개를 잡아먹었다. 그 엽기적인 범죄는 특정 국가 출신 자들만이 저지를 법한 일이다. 뉴스를 전해 듣는 한인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괜히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더 분노했다. 그런데 진짜 한인들 입방아에 오르내린 얘기는 둘 중 한 명은 시민권자라서 감옥에 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시민권이 없는 영주권자라서 추방당했다는 내용이다.  


“영주권자라서 감옥 안 가고 쫓겨난 게 좋은 거야 시민권자라서 감옥에 갔지만 쫓겨나지 않은 게 좋은 거야?”

누군가는 감옥 가느니 쫓겨나는 것이 낫다고 했고 누군가는 가족들 다 끌고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  범죄자로 감옥 갔다 와서 가족들하고 캐나다에 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  당시 나는 초기 이민자였으니  쫓겨나지 않으려면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남편에게도 “쫓겨나지 않으려면 조심하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범죄자가 되지 않으려면 마음먹고 저지르는 범죄뿐만 아니고 실수도 하면 안 됐다. 심지어 운전도 살살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소심한 이민자들 생각이었다. 당시 쫓겨났다는 그 남자의 가족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 남자를 따라서 캐나다를 떠났을까 아니면 남자 혼자만 캐나다를 떠났을까 궁금하다. 


2018년 봄, 토론토 뉴스에 태권도 사범이 어린애들을 성추행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고 한 동양 남자의 머그샷이 하루 종일 뉴스 채널에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태권도 사범이라는 직업적 특수성과 외모나 이름으로 봐서 한국인 핏줄이 분명했다. 토론토 한인들은 태권도 사범이 부끄러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그가 캐나다 시민권자일까 영주권자일까 아니면 취업 비자나 심지어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는 방문자 거나 불법체류자는 아닐까 궁금했다. 직업병이다. 신분에 따라서 받게 되는 벌도 달라진다.  그가 캐나다에서 추방된다면 캐나다 범죄기록을 알 수 없는 한국이나 제3 국가에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2010년 초반에 서스캐처원 사업이민을 통해서 작은 시골 마을로 이민을 간 가정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순자산 3억 정도의 자산이 있고 캐나다에서 하고자 하는 사업과 비슷한 사업 경력이 있으면 영어 능력이나 다른 조건 필요 없이 서스캐처원주 사업 이민이 가능할 때였다. 주 신청자인 김광수 씨는 충남 소도시 바닷가에서 작은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내와 초등학생 딸과 유치원생 아들이 있었다. 


당시 김광수 씨의 나이가 45세였고 그의 아내가 31세였으니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부부였다. 어쩌다가 이른바 국제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한국 사람하고 비슷하게 생긴 베트남이나 몽고 중국 여자랑 결혼할 걸 그랬다” 는 얘기를 두어 번 흘렸다. 이민국 제출용으로 보내온 여권사진에는 앳되고 순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들도 둘 다 동양적인 외양은 찾기 어려웠다. 백인 아내와 혼혈 아이들이 작은 마을에서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을 테고 살면서 주변의 관심이 거슬렸던 게 아녔을까. 김광수 씨는 성격이 불같아서 서류 담당 직원에게 전화기 너머로 몇 차례 격하게 소리를 지른 적도 있고 쌍욕을 예사로 뱉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가방끈이 짧은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으니 무시하는 것 티 내지 마라 "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 내 고객 중에는 명문대학교를 나온 사람도 몇 있었지만 고졸 학력자도 많았고 심지어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유독 김광수 씨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나마 그는   전문대학교를 졸업한 짧지 않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김광수 씨의 ‘솔직함’은 결코 학력 때문 만은 아닌듯했다. 김광수 씨는 몇 년 동안 기다려서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했고 집구 하고 차를 사는 등 정착에 필요한 모든 일을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그를 도와준 정착 가이드로부터 어느 날 이메일이 왔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사스케쳐원에 정착한 고객들의 명부와 그들의 정착을 어떻게 도왔는지, 향후 계획이나 준비할 것은 무엇인지, 그동안 함께 다녔던 행선지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정리된 보고서였다. 가이드 비용 정산을 위한 것이었다. 그 내역을 바탕으로 차후 어떤 ‘케어(돌봄)’가 필요 한지에 따라서 나와 가이드의 협업도 논의한다.  고객 목록 안에  김광수 씨도 있었다. 


이름 김광수, 나이 45세, 샌드오일 (sand oil) 채굴 지역에서 작은 INN을 인수함. 주로 sand oil 관련 종사자들이 장기 투숙하는 사업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비즈니스지만 투숙 고객이 거칠어서 운영이 쉽지 않음.  이민자가 이사 오기 꺼려하는 지역임. 차후 비즈니스를 처분하고 다른 동네로 이주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됨. 

그리고 그가 인수한 INN(소규모 모텔)에 대한 주소 등 세세한 정보와 아이들 학교 등록과 차량 구입 등을 도와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INN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변호사와 회계사 부동산 중개인과 일하면서 있었던 일,  서스캐처원 이민국에 가서 예치금 7만 5천 불을 회수 신청했다는 내용 등 그동안의 여정이 꽤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김광수 씨의 배우자가 러시아 사람이라서 러시아 출신 변호사가 일을 도왔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 고객에 대한 마지막 몇 마디가 있었다.


<진상.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음. 차후 이 고객과 일 안 할 테니  어떤 일도 나에게 의뢰하지 마시오. 맡은 일이니 어쩔 수 없이 마무리는 했지만 내 나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소. > 한국에서 교수를 하다가 서스캐처원으로 이민 가서 그곳에서만 20년을 살면서 노년에 접어든  베테랑 가이드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객은 ‘타일러 가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도 감당하기 버거운 고객이었던 듯했다. 어쨌든 그것으로 김광수 씨와의 일이 일단락되었다. 비행기로 3시간 거리에 그가 살고 있었으니 나에게 연락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영주권 연장이나 시민권 신청도 현지에 있는 대행업체에 의뢰할 가능성이 높았고 설령 나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먼 핑계로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상 고객의 기억을 옷에 묻은 먼지 털어내듯 툴툴 털고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그 김광수 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년만에 목소리를 들은 것이니 기억을 못 해야 정상이지만 전화 넘어 그의 이름을 듣고 '아' 했다. 영주권 연장이나 시민권 신청을 의뢰할 시기였다.  그는 내가 당연히 자신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됐던 사람 같지 않게 인사도 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풀이 죽은 것인지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인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면서도 떨고 있는 것처럼 숨이 고르지 않았다.


“나, 김광숩니다. 서스캐처원.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나더러 캐나다에서 나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기한 내에 출국하면서 공항에서 출국 신고를 하고 나가라는군요.  기한 내에 출국신고를 하지 않으면 잡아다가 비행기에 태워서 내쫓겠답니다. “


“어쩌다가...”


“이게 다 그 씨 바람에 가이내가 911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


입만 열면 쫓아가서 성질 내키는 대로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 거친 욕지거리는 다반사였고 흥분이 최고조인 상황에서는 분명히 욕으로 들리기는 하는데 무슨 욕인지 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술술 뱉어내는 인물이니 그 말도 분명히 누군가를 향한 욕일 터였다. 그 ‘씨바람에 가이내’가 지목하는 인물은 누구이며 당신은 무슨 짓을 했길래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얘기를 해보시라’  하며 이죽거릴 뻔했다. 어찌 들으면 씨가 바람에 날렸다는 것처럼 또 어찌 들으면 씨가 발아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희한하게 경쾌하게까지 들리는 그의 말을 입속으로 빠르게 따라서 반복하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씨 바람에, 씨 발아 메, 씨 발라 메, 씨 바라 메..‘


 김광수 씨의 얘기를 정리하면 ‘얼굴이 반반한 백인 여편네’가 캐나다에 와서 많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살 때는 고분고분했었고 김광수 씨가 무슨 짓을 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이민 와서 영어 학교를 다닌다는 핑계로 바깥바람을 쐬고 다니더니 순 그 동네(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더라.  애들까지 데리고 파티 같은데도 가더니 대놓고 멀끔한 남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더라. 눈이 안 돌아가겠느냐. 그래서 몇 대 쥐어박았다. 그렇게 시작한 푸닥거리가 좀 잦아졌다. 욕은 좀 하고 몇 대 쥐어박기는 했지만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었고 서로 간에 익숙한  상황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여편네가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애새끼들이 머리 굵어지면서 제 어미 편을 들었다. 


어미나 애 새끼들이나 점점 말을 안 듣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애새끼들이 한국말은 안 하고 러시아어와 영어로만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말을 하니 속이 안 뒤집어지겠느냐. 그래서 시작된 시비가 좀 격해졌는데 아무래도 말로 안 될 것 같아  장난 삼아 주방에서 칼을 들고나갔다. 그것을 보고 딸년이 911에 전화를 했다. '싸이카'가 뜨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길로 구치소로 들어가서 집에도 못 가고 격리 조치됐다.  재판을 했는데 여편네 쪽은 러시아 변호사가 나서서 다 해주는데 내 주변에는 도와줄 한인이 없었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멍하니 당하기만 했다.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추방 명령까지 받게 될 줄 몰랐다. 재판하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손이 발이 되게 조옷나게 빌었다. 그런데 애새끼들하고 여편네는 내가 한국에서부터 지속적이고 상습적으로 폭행을 휘둘렀으며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자기들 가까운 곳에 사는 것이 무섭고 싫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져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근근이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방 명령까지 받았다. 여편네야 그렇다고 치고 애새끼들은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지들 아빠한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주변 말 들어 보니 추방당할 정도 일은 아닌데.. 이게 다 그 우즈베크인지 러시아인지 그 인간들이 똘똘 뭉쳐서 작정하고 짜고 벌린 일이다. 


생각해보면 캐나다로 이민 가자고 꼬드긴 것도 마누라다. 한국에서 애들이 살기 힘들다면서 캐나다에 가면 영어 배워 좋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많고 혼혈이라고 해서 인종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테고 당연히 놀리는 애들도 없을 테니  캐나다로 가자고  졸라대서 하는 수 없이 왔다. 이제 보니 그것도 다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  재산도 다 뺏기고  아들도 뺏기게 생겼다. 한인들이 힘을 합해 억울하고 불쌍한 나를  도와줘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같은 한인끼리 도와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장실장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토론토에는 유능한 인권 변호사가 있을 테니 재산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  제 어미하고 똑 닮은 ‘씨바람에 가이내’ 하고 여편네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아들하고 재산만 찾으면 된다. 그러니까 김광수 씨가 지목한 그 ‘씨바람에 가이내’는 열여덟 살 딸이었다.  칼을 들고 설쳐 대는 아빠라는 인간을 보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본능대로 판단하고 배운 대로 행동했겠지.  


“이미 추방 명령을 받았으니 뒤집기는 쉽지 않겠습니다만 기다리세요.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내 말에


“이 누무 나라는 남자를 지나가는 동네 개조옷만치도 대우를 안 해주잖아요? 처음에 이민 왔을 때  캐나다에서 대우받는 순서가 어린애, 노인, 여자, 강아지 그다음이 남자라는 말을 듣고 웃어넘겼는데  내가 이 꼴이 되었네요. 허참. 개 조옷 같은… 암튼, 같은 한인끼리 이럴 때 도와야죠. 내가 그 러시아 년한테 다 뺏기면 안 되잖아요? “라고 했다.


나도 소리 나지 않게 허참. 하고 웃을 수밖에. 그 뒤로도 몇 번 더 김광수 씨로부터 변호사는 알아봤는지 전화가 왔다. 나는 ‘씨 바람에 개 주옥같은 고객님. 그러니까 왜 가족들을 때리고 그러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변호사를 수소문해봤는데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 안타깝다 “ 하고 얼버무렸다. 김광수 씨는 “러시아 놈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데 한인들은 그래서 글러먹었다” 거나 “한인끼리 너무 한다"라는 말을 몇 차례 했지만 내 답변이 시원치 않으니 제풀에 지쳐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광수 씨는 캐나다를 떠난듯했다. 지금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김광수 씨로부터 이메일을 받는다. 


그 내용은 매번 본인이  국제결혼 잘못했다가 인생 조진 불쌍한 인간이며 나이가 많아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 캐나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이 반복되었다. 김광수 씨의 이메일에 딱 한 번 ‘죄송하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서 도와드릴 수 없고,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 캐나다에 돌아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캐나다에서는 단순 폭행의 경우 5년 이하, 무기나 흉기를 이용한 폭행과 위협은 중범죄라서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김광수 씨가  영주권자가 아닌 시민권자였다면 추방 대신 중형을 받았을 것이다. 2018년, 김광수 씨가 살던 서스캐처원 주는 클레어 법(Clair’ Law)을 시행하려고 준비 중이다. 클레어 법이란, 2009년 영국 맨체스터 지역에서 남자 친구에게 살해당한 클레어 우드라는 39세 여자의 이름을 딴 것으로,  배우자나 애인의 폭력 전과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캐나다의 경우 성범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범죄기록을 고지하지 않고 있고 이른바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른 폭력 사건과 구분 짓지 않았다. 


2015년  서스캐처원 주의 재정국장이었던 여성을 남편이 등 뒤에서 총으로 쏴서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클레어 법의 도입이 빠르게 추진되었다. 서스캐처원의 경우 2015년 약 6천 건의 ‘친밀한 상대에 의한 폭력’ 신고가 접수되었고, 인구 10만 명당 650여 건이다.  토론토가 있는 온타리오 주는 인구 10만 명당 230여 건이 신고되었다. 김광수 씨처럼 영주권자로 살다가 가족이 신고를 해서 추방된 사건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축에 든다. 가족이 다 같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거나 남편이 주 신청자가 되어 영주권을 신청 중인 가정은 가정폭력을 당해도 가족 전체가 쫓겨날 것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하는 사례도 있다. 


반대로 한국에서 남편이나 아버지의 폭력 또는 지인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다가 피신 온 사례도 꽤 많다. 무작정 도망 오다 보니 일반적인 캐나다 영주권 수속을 할 자격이 안된다. 그래서 난민 지위와 비슷한 ‘정상 참작’이라는 낯선 제도를 통해 캐나다 체류를 시도한다.


정상 참작이란 난민 신청을 했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 또는 난민은 아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캐나다에 체류를 할 수밖에 없을 때 신청할 수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망명자로 캐나다에 정착한 것은 꽤 오래된 얘기다. 20여 년 전 토론토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은 서슬 시퍼렇던 박정희 정권 때 망명을 와서 캐나다 영주권을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자녀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분을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분의 망명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라서 편하게 여쭤보지 못했다. 


그 당시 어르신의 연세가 70세가 넘었으니 다시 만난다 해도 상세한 이야기를 듣기에는 늦은듯하다. 전두환 정권 때, 잡히면 죽는다고 해서 짐 보따리도 못 챙기고  ‘토꼈다’는 분을 만난 적도 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풍인지 알 수 없는 어르신들의 ‘도망자 스토리’도 듣는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한국인도 정치적인 이유로 난민 신청을 하신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 중에  영주권까지 받고 정착 한분들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때 전 재산을 다 잃고 빚쟁이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 왔다는 분들의 사연은 당시에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였다. 내가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옆 동네에도 비슷한 사연을 가진 가족이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아들만 둘인 부부는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고 도피한 것인데 사채업자와 채무자들에게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이었고 한국에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다면서 난민 신청을 했다. 그 가족이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하는 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고 말하기엔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던지 영주권 받은 후 그 집 남자가 혈액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얼마 전 우연히 그 가족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들 둘이 아버지를 닮아 훤칠하게 키가 크고 인상 좋은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큰아들은 누구나 다 아는 커피 프랜차이즈 본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아서 전문대 졸업하고 부모님과 같이 세탁소를 운영한다고 했다. 영주권만 받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더니 정말 죽을병에 걸렸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영주권 덕에 병원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치료받는 중이고 차도가 있으니  금방 죽을 것 같지는 않다고 멋쩍게 말했다.  영주권을 받기까지 마음고생이 어땠을지 짐작되는 말이었다. 나는 그 가족의 영주권 취득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다만 지난 10년간 2000여 명이 4000억 넘는 금융기관 채무를 갚지 않고 해외로 이민을 가버렸다는 뉴스를 보고 빚을 갚지 않고 해외로 도망 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했다. 최근에는 한국인이 캐나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거나 정상 참작으로 영주권을 받았다는 소식은 듣기 어렵다.  한국이 몇십 년 전처럼 군부 독재자가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고 법치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정상 참작을 신청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한국인도 정상 참작으로 영주권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민대행업체들이 현혹하기 때문이다. 


몇백만 원에서 천만 원 이상 수속 대행료를 챙기기 위해   수속 중 갖게 되는 특혜 즉, 학비 면제나 노동 허가를 받을 수 있다며 고객을 유치한다. 하지만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정상 참작 심사에서 거절되면 캐나다에서 추방당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안내하는 경우는 드물다. 2008년 무렵 난민 신청 피해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전화 문의가 부쩍 많아진 때가 있었다. 


이민 수속 대행을 하던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기 딴에는 학비 때문에 고민이 많은 유학생 엄마들의 시름을 덜어 주고 싶었던지, 난민 신청을 하고 학비 면제 혜택을 받으라며 고객 유치를 했다.   난민 신청을 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학비 면제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민 신청을 한 유학생 엄마들이 그 결과가 무더기로 나온 2008년에 캐나다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생겼다.  김 아무개가 수속비로 챙긴 돈이 일 인당 만 불(약 1천만 원) 가까이 됐으며 그 일로 받은 전화가 적어도 십여 통 이상이었다. 김 아무개는 꽤 많은 돈을 수속비 명목으로 챙긴듯하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추방당한 엄마들이 김 아무개의 말을 듣고 아이들을 캐나다에 두고 출국했는데 김 아무개는 아이들을 볼모 삼아 부모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했다. 처음에는 학비를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캐나다 생활에 적응을 한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 부모가 캐나다에서 추방당하면  2년 이상 재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뾰쪽히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중에 몇 명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조언을 구한 것이다. 


“애가 제 말을 안 들어요.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해도 싫데요. 제가 캐나다로 들어갈 수 없으니 애를 설득하기도 쉽지 않네요. 김 실장님은 자꾸 애 생활비 명목으로 돈 보내라는 연락을 하는데 돈 액수가 적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난민 신청을 했는지 몰랐어요. 김 실장님이 학비 안 내고 학교 다니게 해 준다고 해서 믿고 맞긴 거죠. 뭔지도 모르고 달라는 서류 다 줬더니 알고 보니, 그게 난민 신청이었더라고요. 지나고 보니 속은 거예요. “


어떤 엄마가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면서 한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전화를 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았다, 속았다는 말이 맞겠지. 하지만 얻는 것만 생각하고 잃을 것이 무엇인지 왜 진작 따져보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믿고 따랐다면 믿는 만큼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김 아무개만 나쁜 사람인지 모를 일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난민이나 정상 참작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장 흔한 예는 가정폭력이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탄원서를 받기도 하고 한국에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변호사를 동원하기도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정상 참작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여자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승인율이 매우 낮아졌다. 가짜 정상참작 신청 사례가 난무하면서 진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가정 폭력 피해자들까지 비자거절을 당하고 있다. 가정폭력 앞에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을 심심치 않게 듣다 보면 가족의 폭력 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세상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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