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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09. 2019

4-2. 영주권 신청자 자녀 학비 면제 프로그램.

김 미영 씨는 남편을 닦달해서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새벽마다 깨워서 학원에 보냈다. 학원에서 남편이 배워온 내용을 날마다 같이 복습했고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도 같이 앉아서 목표한 양만큼 영어 공부를 한 후에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 과정이 꽤 힘들었을 텐데 남편은 잘 견뎌 주었다. 공부 머리도 제법 좋은 사람이라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필요한 영어 점수를 받아왔다. 그래도 꼬박 1년 6개월이나 걸렸다. 드디어  영주권 신청을 하고 아이들 유학비자를 받고 엄마는 동반 보호자 비자를 받아 토론토에 들어왔다.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내역을 가지고 교육청에 가서 아이들 학비를 면제받았다.   


"캐나다로 오겠다고 결정하기 전 독일도 알아봤어요. 아는 사람이 독일에서 유학을 했는데 좋은 나라라더군요. 그런데 독일은 한국처럼 장애인 아이들의 교육을 비 장애인들과 분리해서 한대요. 캐나다는 통합 교육을 한다더군요. 캐나다가 맘에 들었어요. 장애인들도 어차피 그 사회의 일원이고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데 교육을 분리해서 하게 되면 나중에 또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학생 비자를 받을 때 아이의 장애가 문제가 될까 걱정했다. 하지만 의사 소견서에 아이의 장애가 심하지 않고 학교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으며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써서 제출했더니 비자가 발급되었다. 의외로 순탄했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얼만 안됐지만 아이들은 캐나다를 좋아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캐나다는 훨씬 좋은 나라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친절하고 무엇보다 둘째 딸이 장애 때문에 차별당하지 않아서 좋았다. 캐나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좀 다른 사람 '으로 생각하고 불편해도 참아준다. 한국이라고 해서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성가신 일을 겪거나 손해 볼일이 생기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 "병신 새끼 때문에"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손해 볼일이 없을 때까지, 거기까지다.  캐나다에 와서 시내버스 타고 다니던 어느 날 버스 바닥이 내려앉고 버스 기사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사고가 난 줄 알았다. 그런데 기사가 어슬렁어슬렁 장애인이 탄 휠체어를 밀어서 버스에 태우더라. 


심지어 그 장애인과 친한 친구처럼 인사하고 농담까지 하면서. 승객들도 불만 없이 장애인 휠체어가 버스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 젊은 남자 하나가 불만 섞인 한마디를 나지막하게 내뱉었다가  다른 승객들이 다 같이 째려보는 바람에 기가 죽은 남자는 더 이상 군소리를 못했다. 장애인도 미안한 기색도 없고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더라. 캐나다가 그런 나라다. 약자는 보호와 배려의 대상이지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저상 버스를 그대 처음 봤다. 캐나다에서는 그런 버스가 벌써 몇십 년 전부터 다닌다더라. 혼잡한 시간대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일인용 미니 버스를 대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격은 일반 버스 요금과 같다더라.


 그게 캐나다다. 처음에는 캐나다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마음이 착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십 년 전부터 약자를 위한 법들이 마련되고 약자가 살기 힘든 나라는 모두 다 살기 힘든 나라라고 교육을 하니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인식의 변화는 제도를 바꾸고 교육을 하는데서 시작한다. 단순히 캐나다 사람이 착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 미영 씨는 큰 발견이라도 한양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을 치켜뜨고 속닥 거렸다


처음 아이들과 학교에 갔을 때 교장과 대면 상담을 했다. 아이의 장애에 대해서 얘기했다. 교장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주겠다고 했다. 교육청 직원과 사회복지사와 학교는 주기적으로 모여 장애아동의 교육에 무엇이 필요한지 상의한다. 그리고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모임이 있는 날은 엄마도 참석해서 의견을 얘기할 수 있다.  그 모임에 김미영 씨도 참석했다. 교장은 “아이의 장애가 심각하지 않으니 많은 지원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했다. 영어가 편치 않은 김 미영 씨를 위해서 참석자들은 최선을 다해 쉽게 설명했지만 두 번째 모임부터는 통역을 대동했다. 영주권이 있었다면 통역 비용도 정부에서 냈을 텐데 영주권이 없었으니 그것까지는 지원해줄 수 없다면서 교장은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김 미영 씨는 처음 그 미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이 흘렀다.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그날 처음 울었어요. 제가 울면 애들이 긴장하니까 잘 안 울어요. 혼자 있을 때 울고 싶어 지기도 했지만 버릇될까 봐 안 울어요. 제가 긴장이 풀리면 우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 어지간히 긴장했었나 봐요. 오늘 실장님 앞에서 두 번째 우네요. 어젯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더니 … 여기 와서 긴장이 풀리는 것인지 자꾸 눈물이 나네요. “


눈물이 글썽글썽한 김 미영 씨가 눈물을 훔치지도 않고 나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캐나다가 좋기는 하지만 늘 긴장하고 살아요.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요즘은 아이의 장애보다 영어를 못하는 내 장애가 더 큰 것 같아요.”   


교장 말대로 아이의 장애가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서 현실적으로 도움될 정부지원은 없었다. 다만 장애 아동에게 관심을 갖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봐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투는 친절하다. 그래도 성가시고 귀찮은 속내가 들여다보여 늘 기죽어 지냈다.  캐나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딜 가든 성가신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모임에 다녀오는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장애가 있다고 놀리는 아이도 없었고 신경 써주고 배려해주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못된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 대부분 호의적이다 보니 못된 아이 한두 명은 큰 문제가 안되었다. 최근에는 반 친구 중 어떤 백인 아이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서 하루 종일 놀다가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친구 아이 가족들도 모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김 미영 씨와 아이에게는 즐거움을 넘어서 감격스러운 일었다. 그들이 베푸는 친절이 가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기 사람들은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 뿌듯해하고 위안을 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게 싫지 않다.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존심이 상했는데 여기서는  받아들여진다. 이상하다. 오히려 장애가 있는 둘째보다 늦은 나이에 와서 영어 습득이 느린 큰아이가 캐나다 생활을 버거워했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고 가족 모두 토론토 생활에 만족스럽다. 


유학원 담당자 말대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캐나다에 왔지만 이제 어떻게든 캐나다에서 살고 싶어 졌다.  아이들도 당연히 가족이 캐나다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영주권을 받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 합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날마다 밤샘 야근하면서 사는 것도 지치고 아이들이 캐나다를 좋아한다고 하니 “밑바닥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가족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자"라고 했다.   


“ 일 년 정도 기다리면 영주권을  받을 거였어요. 그런데 남편이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데요... 큰일 난 거죠? ” 김 미영 씨는 남 얘기하듯 맥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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