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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Jan 09. 2019

4-1. 장애아의 엄마

2010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수더분한 차림새의 엄마가 아이 둘과 함께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중 초등학교 1학년이라던 작은 여자아이는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마주 앉았다. 김 미영 39세 기술이민 영주권 신청자. 영주권 신청자 학비 무료 제도로 초등학생 자녀가 공립학교에 유학 중( 현재는 없어진 제도다). 엄마는 자녀 동반 비자로 체류 중. 그날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매주 있는 영주권 세미나에도 온 적이 있고 유학생 엄마들이 모여서 정보 교환도 하고 수다도 떠는 ‘토론토 맘 티타임’에도 자주 모습을 보였었다. 밝고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질문도 많았다. 하지만 나와 일대 일로 마주 앉은 것은 처음이고 장애아 딸이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무렵에는 영주권 수속 중인 가정의 아이들이 캐나다의 공립학교를 무료로 다닐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당시는  학력과 경력, 나이, 영어 점수 등으로 기술이민을 신청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주권을 받던 때였다. 영주권 수속이 마무리되는 데까지 2년 이상 걸렸고 영주권 승인을 받으면 좋고 못 받는다고 해도 2년 동안은 학비를 내지 않고 자녀 유학이 가능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그 제도를 이용해서 ‘영주권 신청자 학비 면제 유학’을 와 있었다. 그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이미 영주권 신청을 해서 캐나다에 체류 중인 김 미영 씨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 의아했다. 다른 업체에 수속 의뢰를 하고 돈은 그쪽에 다 내고 까다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정보는 나에게 얻어 가는 밉상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 미영 씨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달갑지 않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김 미영 씨는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듯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고 내가 만만해 보였나 보다. 김 미영 씨의 남편은 한국 대기업에서 통신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남편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시간을 내서 강남의 영어 학원에 다녔고 밤샘 공부를 해서 필요한 만큼의 영어 점수를 만들어서 영주권 신청을 했다. 


김 미영 씨 부부가 캐나다 영주권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작은 아이의 장애 때문이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만 눈에 띄었지만 팔의 움직임도 불편하고  심하지는 않지만 뇌성마비와 안면 기형도 있었다. 김 미영 씨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 본인이 했던 모든 노력과 성취감, 자긍심은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저주로 바뀌었다. 


둘째를 갖기 전 김 미영 씨 부부는 많이 다퉜다. 남편은 날마다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집에 들어왔고 가족에게 무관심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고 시부모님이 큰아이 양육은  도맡다시피 했지만  김 미영 씨는 늘 무엇인지 모르게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그런지 직장 생활도 한참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주요 과목 교사가 갖는 입시에 대한 부담도 꽤 무거웠다. 말 안 듣는 학생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더 미웠다. 교사로서의 사명감은 온데간데없고 입시 실적에 따라서 웃고 우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공립학교 교사가 학원 강사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수입도 좋고 인정받으면서 승승장구하는 대학 동기들을 볼 때는 ‘이러려고 임용고시에 목맸나, 선생질은 왜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 계획에 없던 둘째가 생겼고 임신 소식이 반가울 리 없었다.   


 “아이 하나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둘째는 …  낳고 싶지 않았어요”   


김미영 씨는 대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이들을 힐끗 돌아보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눈망울이 흐려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첫째 임신했을 때처럼 산부인과도 자주 안 가고 장애 검사 같은 것도 안 했어요. 검사해서 장애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안 낳았겠죠.? 알았어도 낳았을까요? 많은 동료 여자 교사들이 집안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힘들게 직장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 보면 그다음부터는 비교적 수월 해지니까 그때까지만 버텨보자 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둘째가 태어나고 난 후 ‘금방 끝날 일이 아니구나’ 싶더군요. 


주변 사람 아무도 저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모든 것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둘째 같은 애가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시간 여유가 많아서 장애 검사를  미리 받았을 테죠. 장애아 엄마가 주제도 모르고 선생이랍시고 고개 빳빳이 들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시작은 주제를 모르고 날뛴 내 잘 못이라 생각하니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 했던 선생님, 그 일이 저주스러웠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한국 사회는 그래요. 장애아 엄마는 죄인이고 주제 파악 못하는 여자는 벌 받아 마땅한 거죠. 그래서 전 벌을 받는 거라 생각했어요. 아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친정 엄마가 둘째를 맡아서 봐줄 테니 학교 선생은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말 듣고 얼마나 울었던지... 한없이 엉엉 울면서 그렇게 하자고 할뻔했어요. 엄마니까 딸에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 엄마가  나보다 더 좋아했는데 선생 때려치우면 엄마도 속상할 테니까, 엄마가 딸 대신 장애 있는 손녀를 봐주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는 엄마로서 딸에게 뭘 해줬나, 뭘 해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결국 육아 휴직 끝나고 학교를 그만뒀어요. 많이 망설였어요. 일단 장기 휴직을 하고 상황 봐서 진로를 결정할까 생각도 했는데 어느 날  아이를 내팽개치고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질까 봐 무서웠어요. 배수진을 치고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사직을 했어요.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 마음이 하루하루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이라는 것은 안 겪어 본 분들은 몰라요. 그래서 저는 백수가 됐죠.”   


김 미영 씨가 한숨을 쉬더니 웃었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풀썩풀썩 웃었다.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이었다.   


 “실장님 한국 사회 아시죠? 얼마나 잔인한지. 자신과 다른 사람은 사람 취급 안 하는 잔인한 사회예요. 제가 학교 선생을 해봐서 더 잘 알아요. 남들보다 약하거나 남과 다른 애들은 학교에서 버티기 힘들어요. 어른들이 그러니 애들은 그대로 따라 배우는 거죠.”   


김 미영 씨 딸은 만 두 살 되던 해부터 장애아 치료실에 다녔다. 나이가 들수록 배워야 하는 과목 수가 늘어날 텐데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가능하다면 몇백만 원씩 들여서라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정부 지원이 몇십 만원씩 나오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일을 그만두었으니 남편 벌이로 큰아이까지 감당해야 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맘을 독하게 먹었다.   


“일반 교육을 시키기로 했어요. 저도 어차피 선생이었는데 한번 해보자 싶더군요. 일반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도 동네 공립학교를 보내보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 버릇해야 살아가는 법도 배우게 될 테니까. 그런데 유치원부터 문제였어요. 다들 장애아가 무슨 유치원에 다니냐고 했어요. 주변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장애인 학교에 보내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이랑 같이 해나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거든요. 명색이 선생 하던 사람인데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일반 유치원에서는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동네에서 가장 비싸고 시설도 좋은 영어 유치원에 보냈어요. 엄마들은 교양 있는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유치원 애들은 아직 어려서 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숨기지 못하잖아요. 애가 많이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아요.  아니, 어른들도 위로하는 척하면서 속을 긁어 대는 소리를 많이 해요.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태어난 애나 부모나 다 힘들고 피곤한데.. 낳지 말지 그랬니...” 그러더군요. 친하다고 생각해서 한말이겠죠? 그 자리에서 "나도 내가 장애아 엄마가 될지 몰랐다. 사람 팔자 모르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잖아.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별 탈 없이 살았다고 해도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니.  늬들도 조심해. 어느 날 멀쩡한 늬 애들이 사고를 당하든 몹쓸 병에 걸려서 장애아가 되지 말라는 보장 있니? 그때 가서 애한테 차라리 죽으라고 해라. 지금 한 말 곱씹으면서."라고 했더니 다 같이 기함을 하더군요. 제 말이 저주처럼 들렸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걔들도 제가 안쓰러우니 한 말일 텐데...  참을걸 그랬어요. 제가 생각해도 섬뜩한 말이에요. 그 이후로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도 안 나갔어요. “


유치원 교사가 누구랑 싸웠다. 누가 밀어서 넘어졌다. 등등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이야기해줬지만  모른 척하고 살았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살면서 겪을 일이고 견뎌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 정도 오기와 각오도 없이 장애인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하게 마음먹고 죽기 살기로 살아야 그나마 버티니까. 


그 유치원에 캐나다에서 온 교포 선생이 있었다. 어느 날 교포 선생이  캐나다 유학을 권했다. 그 선생 말에 의하면 캐나다는 인종 차별은 있을지언정 장애인 차별은 없는 나라였다.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천국의 비밀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캐나다 유학에 관심이 생겼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연간  6~7천만 원 이상 드는 유학 비용을 남편 혼자 벌어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것이 ‘영주권 신청자 학비 면제 프로그램’이었다. 유학원에서는 일단 영주권 신청을 하고 캐나다에 가면 학비 면제를 받을 수 있다면서  영주권을 못 받으면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학비를 내고 유학생 비자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영주권 신청을 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 한지 강남의 거의 모든 이민대행사와 상담을 했고 인터넷 카페를 뒤졌다. 김 미영 씨는 ‘백수’ 였으니 영어 시험 준비를 할 시간이 많았고 남편보다 절실했기 때문에 영주권 주 신청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바뀐 기술이민 직업군에 해당되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은 전산 기술자로 직업군에 해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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