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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2024-05-31a 금) 서유럽 렌터카 여행(60)

by 이재형

프랑크푸르트의 렌터카 회사를 찾아갔더니 그곳에는 중년의 남자 직원 혼자만 있었다. 나와 렌트계약을 맺은 사람은 여직원인데, 월요일에 출근한다고 한다. 직원에게 찾아온 이유를 말했더니, 그가 기록을 찾아보더니 수리비 등을 포함해 2천 유로 정도 나왔다고 한다. 이걸로 일단은 안심이다. 그런데 왜 1만 유로나 되는 큰 돈을 결제신청하여 여행 내내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2천 유로는 나의 자동차보험 보상 한도내의 금액이다. 그렇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나는 약 2천 유로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하겠다는 그의 말에 대해 이 사고는 렌터카 회사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므로 렌터카 회사의 수리비 청구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와 직원 사이에 대략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루어졌다.


: 나는 렌터카를 인수받을 때 회사로부터 연료주입에 관한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였다. 이번 사고는 당신네들이 연료주입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책임은 렌터카 회사에 있으며, 나는 손해배상액을 지불할 수 없다.

직원: 차를 인수해갔으면 그때부터 모든 책임은 당연히 고객이 져야한다. 그러므로 고객께서 변상을 해야 한다.

: 아니다. 차량렌트에 있어 연료주입에 관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당연히 그 정보를 제공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당신네들의 중요한 실책이다. 당신네들이 그 정보를 제공했더라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 나는 20여년간 렌터카 업무를 해왔지만, 연료주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적은 없었고, 그런 사고도 한번도 없었다. 말을 않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고객의 책임이다.

: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니다. 그 정보를 몰라 실제로 이렇게 사고가 났지 않느냐. 독일 소비자법에서 공급자는 수요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고, 그렇지 않아 발생한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공급자가 지는 것으로 규정하다고 알고있다. 이 사고로 인해 나는 3일간의 여행을 망쳤고, 또 숙박비도 이중으로 지출하였다. 오히려 내가 배상을 받아야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자, 그 직원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며 흥분하더니 자신은 차를 렌트해 준 당사자가 아니라면서, 월요일 계약담당자였던 여직원이 출근을 할 것이므로 그녀와 직접 이야기하란다. 나는 계속 월요일엔 내가 출국이라 여기에 올 수 없으며, 또 나는 그녀와 계약한 것이 아니라 당신 회사와 계약한 것이므로 오늘 당신이 결정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뻗대며, 오늘 결제를 하든지 아니면 월요일 다시 찾아와 여직원과 이야기하란다.


이쯤되자 나도 할 수 없다. 어차피 수리비는 내가 가입한 보험사가 지불할텐데, 계속 이러는 것도 피곤하다. 렌터카 업체는 이미 카드로 결제를 신청하였다. 나는 영수증을 받고 렌트카 사무실을 나왔다. 나의 이 행동은 전형적인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이다. 귀국해서 시간이 나면 독일 소비자피해 구제기관과 Hertz 본사에 항의와 구제신청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일이 만약 재판으로 간다면, 나는 내가 이긴다고 확신한다(물론 사실관계가 정확히 파악된다는 전제 하에).


모럴 해저드, 즉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이 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 회사 간부가 회사 공금을 횡령하는 도적적 해이를 저질렀다.”라거나 “공무원이 공금을 가로채는 도덕적 해이를 저질렀다.”라는 등의 표현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의 뜻을 모르는 데서 오는 아주 잘못된 표현이다. 이와 같은 회사간부의 공금횡령이나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도덕적 해이가 아니라 범죄행위이다.


도덕적 해이란 보통이라면 어떤 행위를 하여야(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해보았자 당사자에게 아무런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주 쉽게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일을 하면 월 100만원의 수입을 얻는데, 일을 하지 않는 경우 국가에서 월 100만원을 지원해 준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사람은 구태여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물건을 잃어버리면 보험회사에서 모두 보상을 해준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주의할 필요가 없다. 학생이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는데, 만약 알바를 해서 돈을 벌면 그만큼 용돈을 줄인다고 한다면, 그 학생은 힘들게 알바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이 모두 도덕적 해이이다. 이런 행위는 도덕적으로는 비난은 받을 수 있지만 결코 범죄행위는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해이”이다.


나도 만약 차량사고로 발생한 비용을 내가 모두 부담하여야 한다면 렌터카 회사와 끝까지 잘잘못을 다투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들 내개 돌아오는 이익은 하나도 없다. 비용은 모두 내가 가입한 보험회사가 지불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귀찮게 렌터카회사와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이다. 여기서 보듯이 “도덕적 해이”라는 말 자체가 보험에서 나왔다.


일단 차량사고 문제는 마무리지었으므로 호텔로 갔다. 지금껏 호텔은 거의 시 외곽지에 잡았다. 그런데 오늘의 숙소는 프랑크푸르트의 중심지라 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건너편에 있는 호텔이다. 어두워지기 전인데도 거리로 나오니 분위가가 살벌하다. 인도 곳곳에 불량스런 모습을 한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우며 서성거리고, 술취한 노인, 약에 취한 듯한 중년 사내가 거리를 배회한다. 한쪽에서는 남녀 경찰이 한 남자를 담벼락에 밀어붙이고 신체검사를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경험하는 분위기, 처음 보는 광경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의 도시 가운데 가장 치안이 불안한 곳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이곳 역 부근이 프랑크푸르트의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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