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내가 평생 당신에게 밥을 해 주리다

by 이재현

일요일 아침입니다. 눈을 뜨니 8시가 넘었네요. 지난밤에 글을 쓰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평상시보다 늦게 잠에서 깨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제안했습니다. “여보, 오늘 아침에 목욕 먼저 다녀와서 아이들과 통화할까?” 아내가 대답하네요. 아침 먼저 먹고 아이들하고 통화하고 목욕은 오후에 가자고. 우리는 일요일 아침이면 미국에 사는 아이들과 영상 통화를 합니다.


나는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 뒤따라 나올 줄 알았던 아내가 기척이 없습니다. 뭐하나 싶어 방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누워서 TV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아침을 먼저 먹자는 이야기는 나더러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젠 화도 나지 않습니다. 그냥 의례 그런가 보다 합니다. 살림을 내가 하겠노라고, 앞으로 살림은 내 일이라고 선언한 지가 1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아니 내가 많이 변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 그때는 그것이 나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지금에 생각은 참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남자에게 가장 큰 상실감은 일이 없다는 것이랍니다. 처음 얼마간은 매우 자유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원 없이 잠도 자보고,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밤도 새워보고, 여행도 다녀 보고 이젠 완전히 자유를 찾았다고 기뻐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은 남아돕니다. 이젠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보내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급기야는 자신의 삶이 그냥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허무해집니다. 그런 친구들이 주변에 점점 늘어납니다.


나에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이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나 되냐고. 그 일이 무슨 의미 있는 일이냐고. 나는 반문해 보겠습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밥을 해주고 옷을 챙겨주고 또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끝이 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이기에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그 힘든 일을 내가 하고 있기에 더 대견스럽고 뿌듯한 게 아닐까요?


우리 부부는 주말에 거의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밥해 먹고, 함께 목욕 다녀오고, 장날이면 장구경 가고, 근처 커피숍에 가서 수다 떨고, 저녁이면 하나의 베개를 베고 누워서 TV를 보기도 합니다. 친구가 나에게 물어보네요. 그렇게 붙어 다니면 좀 지겹지 않냐고. 내가 그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희 부부는 주로 언제 대화를 나누니?” “무슨 할 이야기가 있어야 대화를 나누지.”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 안 나눠?” 함께 식사를 안 한다네요. 아내는 그냥 밥만 차려 주고 다른 곳에 가서 자기 할 일 한답니다.


식사를 내가 준비하면서부터 아내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진밥을 좋아하는지 된밥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나는 진밥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된밥을 좋아합니다. 이제는 밥을 좀 되게 합니다. 나는 아내가 맛있게 먹으리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합니다. 나는 이것이 아내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내는 내가 차려 준 밥을 먹으면서 어릴 적 엄마로부터 받던 사랑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식사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은퇴 후 집에 돌아온(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게 된) 남자에게 부부 관계가 낯설기만 합니다. 그동안 사는 것이 바쁘고 힘들어서 세심하게 상대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제 새롭게 다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밥을 해주는 일은 상대에게 편안함을 줍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관심의 시작입니다. 아내에게 용기 있게 한번 말해 보세요. “여보 그동안 나와 아이들에게 밥해주느라고 고생 많았소. 이제부터는 내가 평생 당신에게 밥을 해 주리다.”라고. 하지만 말하기 전에 반드시 확실하게 결심을 해야 합니다. 왜냐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답니다.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통화를 마친 후에 딸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아빠, 엄마가 괴롭히면 저에게 일러요!” 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아빠는 엄마의 괴롭힘을 먹고 산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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