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갱년긴가봐"
"엥?"
"별 것 아닌 일에도 불쑥 화가 나고 감정기복이 심해지는 거 같아"
저녁을 먹으며 남편이 꺼낸 말에 순간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도 감정이란게 있었구나',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 로또남편과 같이 살면서 가장 힘든 건 공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과연 감정이란 게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일에 무덤덤한 사람이다. 반면, 나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우는 것만 봐도 저절로 눈물이 나는 공감능력 만렙인 사람이다. 그래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편의 눈에 나는 늘 오버하는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 여행하던 중에 유럽의 어느 성 천장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내가 "와! 저걸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까?"하자, 남편은 짧게 대답했더랬다. "몰라"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렸는지를 알려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저 "그러게. 대단하네" 아님 "정말 어떻게 그렸을까?" 정도의 맞장구를 기대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기분을 망쳤었다.
또 한번은 월드컵 축구 한국경기를 함께 모여서 보기 위해 언니네 집으로 갈 때였다. 길거리 곳곳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삼삼오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쳐 "대~한민국"이라고 소리쳤다가 남편에게서 "왜 이렇게 야단인데?" 하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 다음부터는 경기를 보는내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면 남편의 눈치부터 살폈다.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한번을 안내고 봤다.
좀처럼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부부싸움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지금 기분이 어떤지 얘기를 한참 하고나면 남편은 "알았어" 한마디로 끝내버렸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고 가는 말이 있었으면 오는 말도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춤까지 추다가 번번히 제풀에 꺾여서 싸움을 접고는 했다.
그랬던 남편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입으로 자신이 갱년기란다. 별 것 아닌 일에 서운한 마음이 들고 감정이 왔다갔다 한단다. 28년간 남편의 무심함에 길들여져서 이제 겨우 조금씩 그의 감정과 내 감정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어쩌면 나는 이 날을 꿈꾸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어디 늙어서 보자'.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없는 그를 보며 28년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때가 된 것이다. 보란듯이 무시해주리라 다짐해왔는데 막상 '갱년기'라는 말을 듣자 그동안의 다짐이 무너져버렸다. 저녁을 먹고 쇼파에 누워 졸고있는 남편을 하마터면 쓰다듬어 줄 뻔 했다.
"당신 어디 아프다고 했지? 나도 산에 가서 약초를 캐다가 줘야지"
"엥? 갱년기 맞네"
남편은 다음날 또 한번 연타를 날렸다. 최애 TV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다가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고있다는 주인공의 사연을 보고는 또 이상한 말을 했다. 평소에 아내에게 잘하는 남편의 얘기만 나오면 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채널을 다른데로 돌려버리던 사람이었는데...
그러고보니 며칠전에는 내가 나가는데 어디가냐고도 물었었다. 남편의 갱년기가 낯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