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솔 Jul 19. 2022

알고리즘의 시대

_ 극과 극으로 갈리는 세상. 중용의 덕은 어디로

요즘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뉴스들을 보면, 세상이 극과 극을 향해 달리는 것 같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고, 양극단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은 극단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모바일 세상에 비친 이 세상은 분명히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는 것 같다.


내 유튜브 계정은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 아이들이 주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내 유튜브에는 만화, 색칠공부, 동요 등과 관계된 동영상이 첫 화면에 가득하다. 소위 말하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 리스트다. 나는 그분을 모르지만, 유튜브 속의 그분은 나를 뼛 속까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전혀 거리낌 없이 초등학생용 동영상을 추천 동영상으로 내 유튜브 계정 첫 화면을 가득 채워주신다. 유튜브만이 아니다.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도, 각종 뮤직 스트리밍 서비스도, 그리고, 모바일 포탈 서비스의  광고도, 쇼핑앱의 첫 화면도, 모두 나는 모르는 그분이 나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있다며, 첫 화면을 그분이 생각하는 내 취향으로 가득 채워주신다.


난 이러한 ‘알고리즘’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가 세상을 극과 극으로 가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느 영역에 관심이 생겨서, 한번 검색하면, 그와 비슷한 내용을 끊임없이 밀어내 준다. 이것이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정치적 성향에 관계된 것이라면, 매우 심각해진다. 내가 본 내용과 같은 성향을 가진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해주고, 이 콘텐츠들을 보거나, 읽다 보면, ‘극단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왜곡된 보편’은 나를 한쪽 극단에 서있게 한다. 그리고, 첫 시작이 나와 달랐던 이는,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나와는 다른 왜곡된 보편’을 통해 나와 다른 극단에 서 있게 된다.  심지어, 뉴스 또한, ‘사실’이 아닌, ‘극단의 시각에 의해 해석된 견해’를 각각 보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중용’이라는 ‘덕’을 배운 적이 있다.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배웠었다. 동양철학의 도덕론의 기본이고, 세상의 현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나만이 아니라, 지금 성인인 모든 사람은 나와 같은 것을 고등학생 시절에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난 지금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논평에서 ‘중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추천리스트를 보면, 간혹 내가 그동안 본 콘텐츠와 전혀 다른 내용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분은 내게 ‘너 이런 것도 있는 건 몰랐지?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분이 ‘중용’을 알리는 없으나,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극단과 다른 극단도 존재함은 내게 소개해줄 수는 있는 존재는 된 것 같다.


그래도, 난 휴대폰 속의 그분에게, ‘난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탐구하고, 당신이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 서로 다른 견해를 찾아보고, 이해할 수 있으며, 당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중용의 덕을 갖춘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마 큰소리로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