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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Aug 15. 2022

공감, 연민, 동정, 아니면 자기만족?

_ 화면 속의 우영우와 내 곁의 우영우

코로나19 이후,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재택근무와 사무실 근무를 병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반 정도는 사무실에서, 나머지 반 정도는 재택근무를 한다. 난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는 집에서 근무를 하기도 하지만, 집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오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동네 단골 커피숍이 생겼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커피숍이지만, 조용하고, 가격도 합리적이고, 노트북 전원선 연결도 가능한 곳이다.


얼마 전, 손님은 나 혼자였고, 비싼(?) 전기세 때문인지, 에어컨은 끄고, 가게의 모든 문을 열어놓은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달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동네 커피숍의 경영 사정이 너무 분명해 보였고, 손님이 나 혼자여서 약간 덥기는 했지만, 있을 만했다. 무엇보다 카운터에는 젊은 아르바이트생(지금 생각해보면, 주인의 동생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만이 가게를 지키고 있어서, 에어컨을 켜달라고 이야기하면, 본인의 권한 밖의 일이라 곤란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하고, 마음은 집에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탁에서 취해 있는데,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생 이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피숍의 문은 이미 모두 열려있는 상태여서, 누가 들어온다고, 문 여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달랐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렇지만 어딘가 주늑들은, 그리고 성인의 목소리임이 분명하지만, 억양은 아이스러운…… 드라마 속 우영우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였다. 저녁에 가있는 마음을 현재로 불러들인 후, 고개를 들고 카운터를 봤다. 약간 체격이 있는,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체격과 얼굴은 20대 중반인데, 아이스러운 청반바지와 짙은 겨자색 티셔츠를 입고, 피규어가 달린 작은 에코백을 어깨에 질러 메고 있었다. 그 여성은, 아이스러운 말투로, 아르바이트 생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메뉴 하나하나에 대하여, 이름의 뜻, 맛, 만드는 법, 그리고 자기가 먹어도 되는 것인 지 등등을 답변에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상냥한 목소리로 모든 질문에 길게 답을 해주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여성은 지적(혹은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차림이었다. 그 여성분은, 아마도, 더운 날씨에 혼자 집을 지키다가, 심심함에 지쳐, 옷을 차려입고 외출한 것일 것이다. 말할 상대를 찾고 싶었으나, 더운 날씨에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실내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에어컨을 튼 상점들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이 열려있는 커피숍을 발견했고, 너무 반가워서 일단 들어와 본 것이리라.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눈앞에 보이는 메뉴판에 대하여 물어보기로 했으리라. 여기까지는 쉽게 추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을 상냥하고, 친절하게 답해주는 아르바이트생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타고난 착한 젊은이일까? 모든 손님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람일까? 이렇게 생각하기에는 목소리가, 이 무더위 속에서, 너무 상냥하다. 그렇다면, 가족 중에, 온 가족이 일터로 나가 있는 동안, 홀로 집을 지키는 지적장애인 동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느라 심심했던, 동생은 언니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피곤한 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여성에게서 동생의 모습이 보였고, 그래서, 상냥하고 친절하게 모든 질문에 답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여성은 한참을 질문하고, 한참을 답변을 들은 후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만족한 표정으로 나갔다. 그 여성이 나간 후, 난 바로 카운터로 가서, 가장 비싼 메뉴로 한 잔 더 주문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본방송만이 아니라, 넷플릭스에서 제공되는 동영상도, 출연 배우들도, 모두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화면 속 우영우에게 느끼는 감정은 공감일까? 연민일까? 아니면, 동정일까? 몇 년 전, 지역에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본인의 자녀를 특수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충돌을 기사로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 내 기억이 맞다면, 지역 국회의원의 관련 공약까지 엮여있었고, 장애인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매일매일 몇 시간이 걸리는 통학거리를 감당하는 부모들의 사연과, 특수학교가 설립되면, 주거환경(?)이 나빠질 것과 집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지역주민들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최고 시청률이 15%를 넘었다고 하던데, 이 드라마 시청자는 ‘내 집 근처에 특수학교를 설립한다’고 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까? 적극 찬성하고, 주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내 집 근처에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입장은 ‘드라마 우영우 시청’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소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가 개인의 가치관까지 바꾸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나와 사람들이 ‘우영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공감도, 연민도, 동정도 아닌 것 같다. 공감, 연민, 동정 등의 감정은 가치관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감정은 ‘난 드라마 속의 우영우의 편’이라는 자기만족이 아니었을까? 난 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괜찮은 놈이라는 자기만족. 현실이 아는 드라마 속에서, 난 정의로운(?) 혹은 공정한(?) 편이라는 자기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달에, 아이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개방 수업을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의 교실에 갔더니, 아이가 내게 열심히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그러다 한 아이를 내게 인사시켜주며, ‘아빠, 얘 이름은 A야. 내가 오늘도 A랑 놀아줬어. A는 내가 잘 놀아줘서, 날 좋아해’라고 말해서, 그 아이를 유심히 봤다. 작은 체구에, 매우 두꺼워 보이는 안경을 쓴 A는, 수줍게 인사하고 도망치는 복도를 뛰어갔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랑 이야기를 했다.

‘친구랑은 같이 노는 거고, 동생들이랑 놀아주는 거야. 그러니까, 친구 A와는 놀아준 것이 아니라, 같이 놀았다고 하는 거야.’ ‘근데 A는 Z반인 걸.’ ‘Z반이 뭐야?’ ‘Z반은 마음이 아픈 친구들 반이야. Z반 아이들은 우리랑 같이 수업을 하기도 하고, Z반에 따로 모여서 수업을 하기도 해. Z반 아이들이 우리랑 같이 수업할 때는, 잘 못하는 것은 잘 도와줘야 해.’ ‘그럼, 너는 친구 A가 같이 수업받으면, 열심히 도와줘?’ ‘응. 특히 종이접기를 잘 도와줘.’ ‘잘했어. 그럼, 친구 A랑 놀 때도 특별히 더 도와주는 거야?’ ‘응, 난 친구 A랑 놀아줄 때는, 항상 일부러 져줘. A는 지면, 울고 다시는 같이 안 논다고 하거든. 그래서 난 A랑 놀 때는 내가 일부러 져. 그러면, A도 기분 좋고, 나도 기분이 좋게 놀 수 있어.’ ‘근데, A는 네가 일부러 져주는 거 몰라.’ ‘당연하지. 얼마나 내가 조심하면서 지는데.’ ‘그렇구나. 하지만, 그렇더라도, A는 네가 놀아준다고 하면 속상해할 것 같으니까, 앞으로 A랑도 같이 논다고 하면 좋을 것 같아.’ ‘응. 알았어.’ ‘근데. 마음이 아픈 것이 뭔 지 알아?’ ‘알지. 몸이 아프면, 쉬기도 하고, 병원에 가기도 하고, 엄마 아빠 친구들이 도와주기도 하잖아. 마음이 아픈 것도 똑같아. 마음이 아프면, 병원에 가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엄마 아빠 친구들이 도와주기도 해야 해. 근데 마음이 아픈 것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으니까, 더 잘 도와줘야 해.’ ‘근데, 그럼 너는 A랑 노는 거 재미있어?’ ‘그럼, 친해지면, 얼마나 좋은데. A는 마음은 아프지만, 착하고 재미있는 친구야.’


물론, 내 딸은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이어서, 장애에 대해서 정확히 알 지는 못한다. 질병은 고쳐야 하는 것이지만, 장애는 있는 그대로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이해하기에는 아직은 어린 나이이다. 그러나, ‘마음이 아픈 친구’라고 친구를 이해하고, 그 친구를 도와주는 방법과 같이 노는 방법을 찾아내는 모습은 어른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초등학생도 찾아내는 서로 도와주고, 노는 방법을 성인인 우리가 찾아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내 단골 커피숍의 아르바이트생은 ‘마음이 아픈 성인 친구’를 도와주고, 같이 노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아르바이트생이 갖고 있는 것은 ‘성인이 되면서 배워야 하는 덕목’이 아니라, ‘성인이 되면서, 대부분 잊어버리지만,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동심’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우리가, 성인이 되면서, 잊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아마도 이것만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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