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해진 날들이 있었다 4

누구도 지지해 주지 않는 길을 결정하고, 외로움을 마주하던 시기

by 지안의 문장

겨울의 아침은 늦은 인사를 건넨다. 가느다란 빛줄기가 창문을 넘어 고요하게 아침을 알렸다. 유행이 지난 올리브색 외투와 두툼한 체크무늬 목도리를 동여매고, 나는 고요한 아침에 홀로 인사를 건넸다.


눈이 내려 빛으로 가득한 길을 밟아본다. 괜히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쌓인 눈처럼 마음에 켜켜이 쌓인 상념을 털어내려 했다. 지나온 발자국 위에 두려움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발걸음을 더 옮겨야 할까. 한참을 눈길 위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어깨에 맨 가방끈을 양손으로 꽉 쥐고 택시를 타러 갔다.


“OO고등학교로 가주세요.”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 오래된 가죽 냄새, 창밖으로 스치는 흐릿한 풍경들을 마주하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불현듯 멀미 같은 울렁거림이 가슴속을 채웠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바다 위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 먹은 것도 없는데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아, 차오르는 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작은 손을 오므려 가슴을 두드려보았다.


툭, 툭-


두드림이 잦아들 무렵 도착한 교정. 작아 보이는 교정을 거닐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했던 기다란 복도와 창문들, 낡은 교실 문이 오늘따라 차갑고 낯설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맨 뒷자리의 의자를 당겨 앉은 뒤, 가장 좋아하는 책을 꺼내 읽었다. 교실에 의자를 꺼내는 소리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어깨를 누르던 긴장감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날이 오기까지 느리게만 흐르던 시곗바늘은 제 속도를 찾았는지 무섭게도 빠르게 움직였다. 모두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제목은 ‘운수 좋은 날’. 나에게 찾아오길 바라는 그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며, 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을 만났다.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써 내려갔다. 시간이 다다랐고, 아쉽게도 마무리되지 못한 이야기가 종이 위에 남았다. 3분 남은 찰나, 나는 읽어보실 심사위원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떤 이야기를 완성할지 궁금하시다면, 제 연습 종이를 함께 읽어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답안지를 제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나를 반긴 것은 그 어떤 여름보다 따사로운 겨울의 햇살, 그리고 차갑고 개운한 바람이었다. 어느샌가 울렁이던 마음의 안개가 걷히고, 고요한 물결이 잔잔히 흘렀다. 소식을 기다리는 그날, 내 마음은 또 어떤 소리를 내며 울릴까.


들꽃의 작은 씨앗이 어디에든 내려앉아 사력을 다해 피어나듯, 나 또한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피어날 터였다.


봄날의 문턱을 지나는 바람은 어쩐지 더욱 춥다. 봄꽃이 피는 걸 시샘한다는 꽃샘추위가 내 방의 온도를 낮추는 듯했다. ‘봄이 올 수 있을까? 내게도 꽃은 피어날까?’ 하릴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고, 나의 하루는 그저 소식을 기다리며 똑같이 흘러갔다.


‘어쩌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더 할 수도 있겠구나. 첫 도전에 합격하면 정말 운이 좋은 거겠지. 괜찮아, 조금만 더 해보자.’ 겁먹지 않으려 스스로에게 건네던 말들이 늘어갈 때쯤, 도착한 문자 한 통이 수줍던 아이를 춤추게 만들었다.


“1차 합격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학교에 들어서자,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 서 있는데도 손 안에는 땀이 맺혔다. ‘그냥 편하게, 내가 준비한 만큼만 보여주자.’ 그뿐이면 되었다. 담담하게 나를 전하는 거다.


오후가 되어 햇살이 창문을 비껴갈 때쯤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심사위원의 지친 듯한 얼굴을 마주하자, 입 주위 근육이 웃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한번 마음 안에 주문을 걸고 입을 뗐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걸 좋아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요. 유아교육과 나왔으면 여기서 배우는 것보다 더 먹고살기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 텐데, 그거 안 하고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침묵이 흘렀고, 눈앞이 아득했다. 숨을 가다듬고 머리를 비웠다.


“저를… 위로해주고 싶어서요.”


간결하게 끝난 면접을 뒤로한 채, 쓸쓸한 하늘을 가만히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매일 유리창에 비치던 표정 없는 얼굴을 닦으며 1차 합격의 순간을 떠올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맥없는 한숨도 새어 나왔다. 침대 위로 푹 꺼지듯 몸을 뒤척이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지안 님, 맞으신가요?”

“네.”

“추가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는 추가합격자였다. 정식 합격자가 입학을 포기해야만 기회가 오는, 대기 명단의 가장 끝에 있던 나에게도 순서가 온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든 피어나는 들꽃. 그것이 바로 봄이 오는 소리였다.


입학과 동시에 계절이 오가는 모든 날들 속에서, 나는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지나가는 계절의 소리 안에서 춤을 춘다. 부끄러움도, 슬픔도, 고독도, 외로움도 가득 끌어안은 채.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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