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신 지 이틀 째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 조문객들을 맞으며 틈틈이 과거 얘길 했다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
큰 언닌 큰 딸인 동시에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매년 반장에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학교에서 사생대회며 백일장에 늘 상을 받아와 무뚝뚝한 아빠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던 딸이었다.
그런 큰 언니의 아들. 첫 손주라 유독 정이 많이 가기도 했지만 아빠의 사랑도 유별났다.
새벽에도 손주가 보고 싶어 달려가고 파란색이 좋다는 한마디에 파란색 신발, 파란색 옷, 파란색 모자, 파란색 가방 별의별 파란색을 다 선물해 준 아빠다.
둘째 언니는 큰언니와 내가 대학을 갔을 당시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을 한 상태라 아빠에겐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비싸다는 컴퓨터며 핸드폰이며 손목시계며 자동차까지 대학 등록금 못지않게 보상을 해 주셨다.
언니의 생일날에는 늘 케이크를 사 오셨다. 내 생일에는 초코파이 하나 사 오신 적이 없는데.
그런 둘째 언니의 딸 둘에게도 아빠는 극진하셨다. 언니가 일을 하면서 손녀 둘을 엄마가 키우셨기 때문에 더 안쓰러워했다. 밤 12시에 과일이 먹고 싶다는 손녀의 말 한마디에 편의점 여러 군데를 들러 몇 종류의 과일을 사서 30분이 넘게 달려가곤 하셨다.
남동생은 남원김씨 종갓집 장손이라 말할 필요도 없이 귀했다.
남동생으로 인해 촌지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들을 위해 선생님께 직접 촌지를 드리며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까지 하셨다는 아빠.
그런데 나는 그냥 낳았기 때문에 키운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편찮으시기 전 그러니깐 2019년 2월 23일 전까진 아빠와의 추억이 없다.
1분 이상 얘기해 본 적도 거의 없다.
나와 어색했던 만큼 내 아이와의 거리도 참 멀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내려가는 외할아버지댁이 어색해서 늘 우는 아이에게 시끄럽다고 저 방에 들어가 있어라며 모진 말만 하셨다.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눈물은커녕 아빠가 얄밉기만 했다.
‘아빠 미운 오리 새끼 안 울어도 서운해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