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기관 내 삽관을 하고 양손 양다리가 묶인 채 수면제를 복용했다.
면회시간에 잠깐 깨 계셨는데 그마저도 며칠 지나니 계속 주무시게 했다.
평택에서 엄마를 모시고 매일 분당으로 왔다 갔다 했다.
마음은 하루 두 번의 면회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왕복 100km 되는 거리가 내 체력으론 한 번만 가능했다.
아빠는 아주 무서운 분이셨다.
한 번 안 된다고 한 건 어떤 일이 있어도 바꾸는 법이 없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찢어진 발가락에 목초액을 바를 때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면 참을성이 없다고 엄청 혼을 내셨다.
초등 3학년 때는 토하면서 등교를 하는 나에게 블록 사이 빈틈에 맞춰 토하지 않고 길거리에 토한다며 또 혼을 내셨다. 워낙에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 한 번씩 그렇게 하실 때마다 내 머리엔 무서운 사람이라는 게 각인되었다.
그런 아빠가...
면회 시간이 끝나 중환자실을 나서는 엄마와 나를 보면서 묶인 손을 바둥거리며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라며 어린아이처럼 울먹이셨다.
엄마는 주저앉고 나는 울었다.
강한 아빠, 무서운 아빠는 온데간데없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한 걸음조차 걷지 못하는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집에 가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곁에 있지도 못하고 모시고 나오지도 못하고 돌아서지도 못했다.
그 병원을 선택한 내가 원망스러워 가슴을 쥐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