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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09. 2023

내 머릿속에도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다.


‘속풀이쇼 동치미’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주로 여성 분들이 아내나 며느리로서 힘들었던 경험을 공유한다. 고구마를 100개쯤 먹은 듯한 이야기들이다. 듣다 보면 기혼 여성분들의 억울한 패턴은 유사하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분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다들 결혼하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이해가 됐다. 억울한 감정은 머릿속에서 잘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비슷한 감정이 올라와도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이 모조리 기억난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은 더 잊히지 않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다 보니 자꾸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그래서 남편과 시댁 사이에 유사한 경험이 누적되다 보면 나만 피해자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사건과 저 사건은 분명 별개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마치 똑같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상황은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잊어야 살아가는데, 힘들었던 순간의 공기와 온도 그리고 습도까지 다 기억나버린다. 환장할 지경이다. 그러는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느냐. 그건 또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나도 남편과 시댁에 잘못을 하고 산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결혼생활에서 한쪽만 100% 피해자인 경우는 없다. 나만 피해자 같지만, 사실 상대방도 피해자다.


하지만 많은 경우 아내가 피해자 같아 보이는 이유는 성향의 차이에 있다. 아내는 남편과 시댁의 과오를 절대 잊지 않는다. 낱낱이 기억해서 마음에 담아둔다. 남편은 아내와 싸웠던 기억을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기억하더라도 싸웠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감정 다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남편과 아내의 성향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쌍방의 기억력이 똑같이 좋거나 안 좋은 경우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남녀를 구분 짓자는 게 아니다. 그저 아내와 남편 중 한쪽은 상황을 조금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잘 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집의 경우는 이렇다. 나는 남편과 시댁의 잘못을 마치 데스노트에 기록하듯 머리와 온몸에 새긴다. 남편은 하루 밤만 지나면 다 까먹는다.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다. 그래서 말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비디오 틀어 놓은 듯 옛날 기억들까지 모조리 가져와서 따발총처럼 공격한다. 반면 남편의 기억장치는 박살이 났는지 데이터가 늘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말싸움에서 이기는 건 늘 내 쪽이다. 생각해 보면 억울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남편이다. 말로 싸울 때마다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와… 나 진짜 미치겠다. 나도 분명 억울하고 상처받았던 게 있었는데 지금 당장 말하라고 하니까 생각이 안 나. 말로는 내가 진짜 너를 이길 수가 없다. 너 말 듣고 있으면 내가 잘못한 거 같다. 미안하다.”


정답이다. 남편은 나를 말로 이길 수가 없다. 하지만 정작 나도 싸움에서 이긴 게 아니다. 괴롭고 힘든 기억들을 계속 잊지 못하고 두고두고 떠올리면서 고통받는 건 나이기 때문이다. 말싸움에서 이겨봤자 얻는 건 없다. 또다시 발 뻗고 자는 건 남편이고, 발도 못 뻗고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건 나다. 어느 순간이 되자, 이겨도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시시했다. 남편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그걸로 위로가 되냐고 물으면, 천만의 말씀이다. 개구리는 이미 던진 돌에 맞아 뒤졌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죽은 개구리가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누가 함부로 던진 돌에 아예 맞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억울한 기억들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들, 통쾌한 기억들로 채워가야지라고 생각을 바꿔먹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서 울어 봤자다. 과거로 돌아가서 바꿀 수 없다. 그때부터는 나는 전략을 세웠다. 남편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하면, 나도 남편이 기분 나쁠만한 일을 일부러라도 꼭 하나 찾아서 했다. 시댁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시부모님과 남편 앞에서 직접 불편하고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를 지키는 건 오직 나다.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남편이 못나거나 나빠서가 아니다. 남편도 남편으로서 또 아들로서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남편이 중간역할을 하더라도 일을 더 크게 만들 때가 많다. 내 입장을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


시부모님께서 나와 다른 생각을 말씀하시면 일단 다 듣고 나서 내 할 말도 다 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서 말씀드려야 한다. 핵심은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도 남편과 시부모님이 나에 대해 욕할 거리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말이 아무리 옳고 합리적이어도 말하는 방식이나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역으로 트집 잡히기 쉽다. 이전 목차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결혼생활에서 나를 지키려면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또한 남편을 욕하지만 말고 남편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남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공부하고 좋은 건 따라 해라. 나쁠 거 하나 없다. 왜 매번 아내들은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고, 시댁만 가면 억울하다고 할까. 반대로 왜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바가지 긁지 않고, 처가댁에 다녀와도 별 탈이 없을까. 이상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작정하고 남편을 연구했다. 남편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하면 나도 남편과 시댁과의 관계가 한결 편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인생은 역지사지다.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남편이 나한테 하는 방법을 모조리 보고 배워라. 내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렵게 얻어낸 꿀팁을 공개하겠다. 결혼생활에서 억울한 감정을 느꼈던 독자들은 메모하고 필히 암기하길 바란다. 참고로 빙그레 썅년은 웃으면서 친절하게 할 말 다 하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억울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하는 “빙그레 썅년 3법칙”]

1.  내 속 편한 대로 행동하고, 나중에 배우자가 화내면 그제야 미안하다고 말하기.

2. 만일 배우자가 “미안하면 다냐.”라고 화내면 “그럼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라고 답해주기.

3. 항상 사과할 때는 진심으로 하되, 그다음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상대방 속 뒤집어 놓기.


괜히 착한 아내나 참한 며느리 한답시고 참고 살 필요가 없다. 참으면 결국 탈이 난다. 아내들도 착한 척하지 말고 남편이나 시부모님 앞에서 천사 가면을 벗어야 한다. 시댁에서도 친정에서 하듯 원래의 내 모습대로 행동해라. 단,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나중에 남편이 서운하다고 하면 그때 가서  “어머, 그랬구나. 몰랐어. 미안해.” 그러면 된다. 미안하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시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하면 된다.


아내들은 이제 징징거리는 건 그만하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라. 과거의 나처럼 내가 나를 못 지켰으면서 남편을 탓할 것인지, 내가 나를 지킬 것인지. 내 경험상 화병도 안 생기고 남편과 덜 싸우는 방법은 후자다. 그 결과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대성공이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무조건 상대방을 미워하고 나쁘게 행동하라는 게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아내와 며느리 역할을 하라는 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억울할 만큼 착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거다. 각자 방법을 잘만 찾는다면 남편뿐만 아니라 시댁과의 사이도 더 좋아질 수 있다.


다 같이 외쳐보자. “그래, 이제 이 구역의 미친 X은 나다!”

이전 11화 희망이 보인다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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