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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전구 Dec 27. 2023

미운 사랑에서 찾아버린 ‘나’라는 사람

'사랑'으로 감싼 것은 모든 아름다운 줄 알았습니다 

“꽃이길래 예쁜 꽃이겠지, '사랑'이겠지 생각했는 데, 가시가 너무 뾰족하더군요. 너무 많이 베어버렸고 그 꽃의 향을 맡기 위해 손에 붕대도 감고 말았어요. 향도 낯설고 맡으면 맡을수록 익숙해지지 않는 향인데 말이죠. 이제는 손에 붕대를 감기 전에, 다칠 수 있는 것인지 그 붕대를 감을 힘이 남아있는지 확인하기로 했어요. 모든 길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모든 길이 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가끔은 길에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으로 하는 합리화는 위험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쑥 노란 형광펜 같이 나타났다. 책을 읽고 있는 데, 구매도 하지 않은 책에 노란 형광펜이 쳐져 있었다. 기억에 안 남을 수 없는 순간이다. 그 책이 정말 잘 맞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단지 책이면 좋다는 생각에 읽었지만 쳐져 있는 형광펜 말고는 내가 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노란 형광펜에 줄이 쳐져 있는 부분이 강조되어 있을 뿐, 그것 조차 공감도 되지 않고,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 깊지도 않았다.


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꽃병과 잘 어울릴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낙엽과 함께 꽃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만 보기 시작했다.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도 그리 하얀 꽃은 좋아하지 않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하얀 꽃도 좋아할 거라고 좋은 향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향은 낯설었고 익숙해지는 순간이 없었다. 기다리고 계속 맡으며 노력했으나 어느 순간 익숙해지기는 커녕 더 낯설어지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지고 있는 꽃병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맞지 않았다. 나쁘지 않다면 모든 것을 ‘사랑’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 데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작은 다른 틈도 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손은 꽃 가시에 찔려 피가 가득하면서 꽃병에도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으며 향도 익숙하지 않은 꽃을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가지고 있었다. 피가 멈추지 않고 향을 맡을 때마다 낯설었던 순간들을 깨달았다. 이 꽃은 놓아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버렸다. 모든 꽃은 아름다우나 아름다울 수 없고, 가시가 있으나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베일 정도로의 가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아픔도 ‘사랑’이라는 것으로 아름답게 포장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꽃병에는 어떤 꽃이 어울리는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어떤 향은 새로워도 좋아할 수 있는지 말이다.

피가 멈추지 않았던 날을 기억한다. 꽃도 그리 생각했는지 더 가시를 세웠고 그로 인해 놓아 버렸다. 어느 순간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다시 돌아보았더니 꽃이 아닌 꽃 위에 앉은 나비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비는 겨울이 되던 해에 다시 날아와 어깨에 앉았었지만 다시는 그 꽃을 들기 위해 손에 붕대를 감고 잡을 수 없었고, 잡기 싫었다. 붕대를 끼며 꽃을 만지고 싶지는 않다.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남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일단 걸었는 데 얼음이 가득한 미끄러운 길이었는 데  좋아하던 신발도 엉망, 너무 많이 넘어져 옷들도 엉망이 되었다. 그 길 옆에 낙엽이 떨어지는 숲길도 있었는 데... 눈이 내리는 게 예쁘다고 생각해서 걸었는 데. 아니었다. 난 그 누구보다 숲길을 좋아했고 바스락 걷는 낙엽의 재미도 아름다움도 알아버렸다. 항상 ‘사랑’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감싸며 이것도‘사랑’이라고 생각한 난. 그 모든 것을 시작하기 위한 나를 '사랑'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버렸다. 주저 없이 이제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감싸지 않기로 했다. '사랑'이라는 것을 감싸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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