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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06. 2024

확률보다 인연을 믿어 봐

[오늘도 나는 감탄 사寫] 8

평일 아침. 5층에 도착하면 보통 7시가 조금 넘는다. 정해진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조금 일찍 도착한다. 2층부터 한 층 씩 올라가면서 건물의 불을 켠다. 이 기분이 나는 참 좋다. 밤새 웅크린 건물을 내가 깨우는 듯한 그 느낌이. 건물 전체의 하루를 '딸깍'하고 시작시키는 듯 한. 물론 내가 출근하기 전에 건물의 칸칸은 독립적으로 밝혀져 있다. 먹거리, 찬거리를 태우고 어둠 속에서 납품을 기다리는 하얀색 트럭과 기사님들. 1층 중앙홀부터 아침 청소를 시작하시는 두 분의 여사님들 덕분에. 그런데 3층에 한 칸, 4층에 한 칸, 그리고 5층에 한 칸에는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와 있는 아이들이 있다.


오늘은 올해 입시 마지막 절차인 정시 접수 마감날이다. 하지만 농어촌 특별 전형에 해당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마감날은 어제였다. 오늘은 휴일이라 행정처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지원할 대학에 온라인 접수를 한 후, 생성되는 증빙 서류를 출력해서, 학급별 일련번호가 부여된 대장에 기록한 후 교사의 확인 도장과 학교 직인을 받아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서류 도착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자동 불합격 처리된다. 학급마다 어제, 점심 무렵까지 그래서 다시 한번 정신없이 분주했다.


아이들을 다 돌려보내면서 그렇게 일과가 끝났다. 그런데 그런 날이 있다. 칼퇴근을 하고 싶지 않은 날. 혼자 남아 느긋하게 이런저런 일을 정리도 좀 하고, 내가 나를 조금 찬찬히 느껴보고 싶은 그런 날. 어제가 그런 날이었나 보다. 썰물처럼 휑하니 다들 빠져나가고 혼자 남겼다. 급격하게 피곤해졌다. 이럴 땐 꼭 엠에스지가 당긴다. 서랍을 열어보니 컵라면이 하나 보였다. 오랜만에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오후 커피도 연하게 한 잔 내렸다. 그리고 새벽에 읽다만 부분을 이어 읽었다. 이럴 때가 조금은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걸 살짝 느낄 때다. 이럴 때 느낌이 참 좋다. 정신없을 때는 또 신나게 같이 정신없다가 탁, 하고 심호흡을 하는 것 같은 이럴 때가.  


30분 정도 더 읽다가 나가면 40분 정도 떨어져 근무 중인 아내 퇴근 시간을 여유 있게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얼굴 전체가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로 눈만 보였다. 그 눈도 완전히 다 감은 듯 가로로 두 개의 줄이 나란히 그어져 있는 듯한 모습으로. 누구니? 했더니 원서 쓰려고요 하면서 동문서답한다. 엉? 시간이 다 끝나가는데, 했더니 죄송합니다. 빨리 접수할게요, 한다. 몇 반이니? 물으니 몇 반이라고 한다. 이름이 뭐니? 하니 아무개라고 한다. 내 수업을 듣지 않는, 낯선 아이였다.


아이들은 보통 이렇다. 자신을 잘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이렇게 하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묻지 않는다. 물론 물음에 단답이라도 대답을 따박따박해주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이십 분 넘게 내 자리 옆에 주르륵 있는 학생 접수용 컴퓨터 3 대중 가운데에 앉아 검색만 한다. 짐짓 모른 척 나는 창가 쪽 내 자리에 서서 책을 읽었다. 잠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얼마뒤 다시 일어나 책을 읽었다. 나는 허릿병 때문에 하루 6시간 정도는 서서 근무한다. 5층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나를 '서 있는 선생님'으로 익히 알고 있다. 몇몇은 오르내리는 내 책상을 신기해하면서.


그런데 잠시 뒤 그 학생이 흐느낀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소곤거리는 그 사이사이에 한숨소리에 섞여서. 통화 중이라 기다렸다. 하지만 이십여분이 넘게 통화는 이어졌다. 얘야? 업무 마감 시간이 끝나가는데? 하고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제야 모니터 위로 초록색 코르덴 모자챙이 쑤욱 올라온다. 그 사이로 두 개의 줄 같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나를 쳐다봤다. '어, 저 아이'. 그랬다. 매일 아침 나보다 일찍 등교해서 어둑한 복도를 절반으로 가르는 한 칸의 불빛을 혼자 다 받고 있던 5층 여학생이었다. 아빠가 일찍 출근하면서 학교에 떨구고 간다고 표현했던.   


문제는 그 아이 역시 특별 전형 관련 서류를 증명받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접수를 한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 전형이었다. 업무라는 게 항상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할 때가 있다. 번거로울 때가 있다. 나름 능력 있는 척하는 잔소리꾼이 되기에는 내용보다는 형식을 따지는 편이 훨씬 수월해질 때가. 일단, 아이한테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바꿔 다시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형식상 그 아이의 담임교사가 되기로 했다. 특별 전형 증빙 서류에는 학교의 고유 일련번호가 학급별로 부여된다. 그 번호가 부여되고 직인과 확인 도장이 있어야 유효해진다.


그런데 대학 입장에서 보면 확인 도장의 담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싶어졌다. 이렇게 처리해 본 게 처음이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정실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여름 무렵 결혼을 한 주무관님이 바로 받으셨다. 혼자 업무 볼 때의 표정보다는 대화를 나눌 때 표정이 더 밝아지는 분이었다.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그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붉어져 있었다. 숨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나도 속으로는 급한데, 생전 처음인 아이는 오죽할까 싶었다. 자, 여기에 이렇게 써. 초, 중 생기부 가지고 있지?, 초본 가지고 있지?


급기야 아이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왜?, 집에 있단다. 다른 서류가 다. 진지하게 '아고, 에휴'하고 싶었지만, 이런 하고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더 울리고 싶지는 않아서.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래 00야. 일단, 심호흡. 자, 해봐 후, 후. 됐어. 침착하자, 우리. 별일 없다, 없어. 다시 후, 후. 좋아. 이렇게 하자. 하면서 행정 처리 절차를 써줬다. 그리고 폰을 꺼내 찍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또 자주 그런다. 잘 듣고, 놓고 간다. 그래서 찍으라고 했다. 그렇게 00 이는 1층 행정실에 내려가 직인을 받아 다시 올라왔다. 직인 위에 확인 교사에 내 도장을 찍었다.


00야, 내가 이제 너의 인생에 살짝 끼어들었는데, 어, 어떡할 거니?

야, 정말 다행이다. 내가 남아있는 이때 네가 와서 말이야. 아침에 일찍 학교에 온 덕에 이런 인연이 생긴 거네. 우리처럼 확률보다 인연을 믿어봐라. 꼭, 합격하거라, 그러면 되겠지

아, 하, 정말 고맙습니다.


살다보면 의외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우연한 인연의 타이밍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될꺼야, 하는 말은 내 안으로 삼켜 넣었다. 뻘건 직인위에 살짝 걸친 진한 (인)뒤에 흐릿하게 연이 보이는 것 같지 않니 하면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보였다. 마스크는 여전히 쓰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다시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가는 00 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다시 앉았다.

그리고 나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 어, 어, 아내 픽업을 깜빡 잊어버렸다. 절반 남았던 컵라면이 다시 컵에 한가득 되어 있는데, 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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