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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19. 2024

#나를 살리는 습관

[오늘도 나이쓰] 42

연일 폭염에 가까운 이른 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곳은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곳도 있고요. 그속에서 추웠던 어느날들이 떠오릅니다. 한파 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었던 어느 날.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각. 


이런 핑계, 저런 꾀를 부리며 한참을 망설이다 오른 러닝 머신이었습니다. 밤새 어둠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을 정면의 TV를 켰죠. 먼저 달렸던 누군가가 고정해 둔  채널에서 한 40세의 독일 여성이 (기억은 안 나는) 어떤 '슈퍼푸드'를 먹고 당뇨가 아주 좋아지고 있다는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 오른쪽 아래 화면에 빨간색 바탕에 흰색 숫자로 그날 아침 기온이 지역별로 바뀌면서 표시되고 있었죠. 원주 -15°, 강릉 -11°, 춘천 -15°, 광주 -6°, 대구 -9°, 부산 -7°,  제주 -0°, 서울 -14°, 전주 -9°, 청주 -12°, 울산 -8°, 의정부 -14°.          


5분 쯤 지나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위해 삑, 삑, 삑 버튼을 세 번 눌렀습니다. 그러자마자 머릿속에 '술담커밀소설'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올랐습니다. 1월말 아내부터 선언한 주문입니다. 일상에 어쩌면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이죠. 동시에 누구나 한 번쯤 '줄이자', '끊어야 하는데'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었지 싶습니다.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술, 담배, 커피, 밀가루, 소금, 설탕입니다. 개인마다 부여하는 의미는 각각 다 다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거의) 완벽하게 줄이고, 끊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어쩌면 지역마다 '춥다'는 기준의 상대성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기후적으로 여름 더위보다 겨울 추위의 정도가 지역마다 크게 차이가 납니다. 더운것은 거의 비슷한데, 춥고 덜 춥고의 차이가 크죠. 그런데 '춥다'의 기준은 어떤 특정 기온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진 온도와의 상대적 차이입니다. 머리결도 자주 넘어 간 방향을 기억하듯이. 


10대의 마지막 3년을 머물렀던 -11°의 강릉 사람들도  0°의 제주도 사람들도 '춥다'라고 느끼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11°와 0° 사이에는 '추운 정도'가 11배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차이가 나는게 분명한 데 말이죠. 높다, 낮다, 많다, 적다와 같은 기준 자체가 몸이 '느끼는' 적응 정도의 결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도 일정 기간 특정한 지역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겁니다. 그 환경에서 적응된 몸에 어울리는 정신 작용이 따라서 일어나게 될겁니다. 


'우리 동네'라고 부르는 특정 지역의 익숙한 타인들(헬스장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자주 마주치는 이들, 하천변을 뛰다 자주 스치는 그분, 등하교길에 자주 마주치는 그 아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누는 그 사람)과도 알게 모르게 나의 작은(때로는 꽤나 큰)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TV속 그 독일 여성보다는 더 크게.          


'다른 동네'에 떨어져 살지만 먼 길을 단박에 달려와 줄 것 같은 친구와 지인들(20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은 초등학교 동창, 길 가다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대학 동기, 지하철에서 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나눈 한 살 어린 군대 선임, 나보다 기수가 아래인 고등학교 후배)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나와 동등한 또는 조금 낮은 대상이라고 내가 임의로 정한 기준들입니다. 그들의 좋아진 혈색이, 인상이, 건강이 설탕, 밀가루, 커피, 술, 담배를 줄이고, 끊어서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게다가 그 결과 원하는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획득했다면. 슈퍼푸드를 먹어 당뇨가 완치되었다는 독일 여성보다는 훨씬 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겁니다.           


동네 러너는 절대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여러번 우승을 한 선수를 자신의 기준으로 삼지 않죠. 다른 학교의 전교 1등은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자극제는 항상 내 옆에(마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 나쁜 자극제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누가 알코올 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거대한 풍선일지도 모릅니다. 신선한 공기 대신 돈 들여, 시간 들여 헬륨을 채워 넣느라 목소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된. 게다가 아주 자그마한 바늘(충격) 하나에 퓨슈슉 지나온 시간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항상 내재하고 있는 덩치만 큰 풍선 말입니다.           


항상 내가 결정하고 나가(는것 같)지만 떠밀려 가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러닝 머신에 올라 어제의 나만 기억하고, 넘어서 보기에 도전합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문장들과 나로부터 나오는 밋밋한 문장들간의 괴리감에 절망만 하지 있어서는 (계속)쓸 수 없으니까요. 


(거의 언제나 그렇지만)마음에 들지 않는 내 글을 한 달 전, 일 년 전 나의 글을 다시 들춰 보고 고쳐보는 혼자만의 재미에 빠져 보는 겁니다. 쫄지 말고, 막 써보는 겁니다. 계속 저에게 주문하는 겁니다.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서 체력을 먼저 키우기.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이 몸과 마음에 찾아오는 한파를 이기는 건 오직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한 기준을 오로지 과거의 나에게서 찾는 마음의 습관을 들여야 할때라고 다짐합니다. '이 정도'로 살기로 결정해야 그렇게 살아지는 거니까 말입니다. 


살아가는 게 정답은 없다지만 그 삶에서 빚어내는 글쓰는데 왕도는 없다지만 나한테 맞는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 그 자체가 게 내가 사는 길일 테니까요. 내 것이 아닌 기준에 정신적으로 두리번거리다 아까운 내 여정이 감동도 없이 그냥 지나쳐 가면 안되니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_창가의 토토(쿠로야나기 테츠코/권남희, 2019,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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