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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21. 2024

대신해 주나요?

[오늘도 나이쓰] 43

날이 뜨거워지면서 요즘에는 자주 한기 가득했을 때를 떠올립니다. 혼자 더위를 이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더워도 낮에는 에어컨 속에서 얇지만 긴 팔을 입어야 하는 체질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몸 안에 계속 채워지는 듯한 냉기를 밀어내고, 칼칼해지는 목도 녹아들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올해 2월 우리 학교 70번째 졸업식. 3년 만에 마스크를 벗은 졸업식이라 냉한 공기 가득했던 강당 안은 금세 온기가 돌았습니다. 기분 좋게 활기찼습니다. 올해 처음 수백 명의 아이들은 (대학생처럼) 학사모에 빨간색, 파란색 후드가 달린 졸업 가운을 입었네요. 차츰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들을 접하는 나이들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 중 하나지요. 


 사이에서 어른이 되고 처음 접하는 뜨거운 여름을 경험하고 있을 스물여덟의 우리 반 아이들도 유난히 반짝였습니다. 어렵사리 졸업장을 받은 아이도 여러 장의 졸업장을 한꺼번에 안겨줘도 모자랄 아이도 다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들을 축하해 주러 온 이들을 거꾸로 넉넉히 더 축하해 주려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여기에 있는 여러분이 가장 애를 썼습니다. 자신에게 크나큰 박수와 함께 냅다 소리 한번 지르세요." 그날 아이들의 환호성이 가장 컸던 순간이었습니다. 5월 선거에서 재당선된 군인 출신 지역 인사의 축사였습니다. 


"그다음은 선생님들이십니다. 저쪽에 계신 담임선생님들을 향해 절을 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세요. 차렷, 경례. 자, 마지막입니다. 뒤로 돌아보세요. 뒤쪽 그리고 스탠드에 앉아 계신 누구? (부모님이요) 누구요? (우리 부모님이요) 그렇죠. 먹이고 재우면서 큰 고생하신 부모님들을 향해 양손을 흔들면서 소리 질러 보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그날도 저의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의아함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아무리 파격적이라 해도 여전히 빼기 어려운 절차 중 하나가 바로 시상이죠. 여러 인사들이 축사 릴레이를 이어가기 전 무대 위에서는 열일곱 개의 기관에서 주는 상이 삼십 분 넘게 수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박수를 쳐주고 있었죠.  


아주 익숙한 광경입니다. 무슨 상을 전달할 때는 기관을 대표(대리)하는 이가 순서대로 나와 사회자가 대신 시상 내역을 낭독하는 멘트가 끝나면 전달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순서말입니다. 수여자와 수상자가 함께 기념 촬영을 한 후 하나의 상이 끝나면 다시 어떤 상은 또 다른 분이 나와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대신 읽어주는 대독입니다. 여전히 관료적인 구조에 남아 있는 관행이죠. 일제강점기 이후에 자리 잡은 군사 문화입니다. 그런데 별로 신경 쓰지 않죠.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높은 분이 낮은 이에게 선물처럼 내려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날 사회를 맡은 젊은 교사는 상기는 열굴로,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열일곱 번 대독을 했습니다. 그분이 엊그제 제 책상 위에 손을 꼭 잡고 풍선을 든 채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진이 새겨진 푸르고 초록한 자그마한 엽서를 올려놓았습니다. '00가 결혼해요'. 요즘 보기 드문 결혼 청첩장이었습니다.  


어제, 열아홉 따님이 묻더군요. '아빠는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면 엄마랑 다시 결혼할 거야?' 열흘간 자신이 다녔던 유치원 봉사활동을 마친 날이었습니다. 3살, 4살, 5살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 나온 질문이었네요. 그 나이 시절을 다시 겪을 수 있느냐, 는 속뜻이었나 봅니다. 


수십 번째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면서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결혼식, 졸업식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세리머니는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기념식이었다는 것을요.


'언제까지 대신해줘야 하나'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바람일 겁니다. '언제까지 대신해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바람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돌아봅니다. 다 키워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는 지금 스스로 알아서 잘 살고 있나? 그렇다면 그 시작점이었던 기념식이 언제였을까? 하고'. 어찌되었건 오늘도 스스로 가득한 하루를 만드는데 직접 나서야 하는 하루인 게 분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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