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이쓰] 43
그날도 저의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의아함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아무리 파격적이라 해도 여전히 빼기 어려운 절차 중 하나가 바로 시상이죠. 여러 인사들이 축사 릴레이를 이어가기 전 무대 위에서는 열일곱 개의 기관에서 주는 상이 삼십 분 넘게 수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박수를 쳐주고 있었죠.
아주 익숙한 광경입니다. 무슨 상을 전달할 때는 기관을 대표(대리)하는 이가 순서대로 나와 사회자가 대신 시상 내역을 낭독하는 멘트가 끝나면 전달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순서말입니다. 수여자와 수상자가 함께 기념 촬영을 한 후 하나의 상이 끝나면 다시 어떤 상은 또 다른 분이 나와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대신 읽어주는 대독입니다. 여전히 관료적인 구조에 남아 있는 관행이죠. 일제강점기 이후에 자리 잡은 군사 문화입니다. 그런데 별로 신경 쓰지 않죠. 좋은 날이고, 좋은 일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높은 분이 낮은 이에게 선물처럼 내려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날 사회를 맡은 젊은 교사는 상기는 열굴로,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열일곱 번 대독을 했습니다. 그분이 엊그제 제 책상 위에 손을 꼭 잡고 풍선을 든 채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진이 새겨진 푸르고 초록한 자그마한 엽서를 올려놓았습니다. '00가 결혼해요'. 요즘 보기 드문 결혼 청첩장이었습니다.
어제, 열아홉 따님이 묻더군요. '아빠는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면 엄마랑 다시 결혼할 거야?' 열흘간 자신이 다녔던 유치원 봉사활동을 마친 날이었습니다. 3살, 4살, 5살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 나온 질문이었네요. 그 나이 시절을 다시 겪을 수 있느냐, 는 속뜻이었나 봅니다.
수십 번째 뜨거운 여름을 기다리면서 더욱 진하게 느껴집니다. 결혼식, 졸업식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세리머니는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기념식이었다는 것을요.
'언제까지 대신해줘야 하나'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바람일 겁니다. '언제까지 대신해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바람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돌아봅니다. 다 키워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나는 지금 스스로 알아서 잘 살고 있나? 그렇다면 그 시작점이었던 기념식이 언제였을까? 하고'. 어찌되었건 오늘도 스스로 가득한 하루를 만드는데 직접 나서야 하는 하루인 게 분명하네요.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