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운전 경력을 이야기할 때 시작점이 되는 날이 있습니다. 친구 셋이 차 안에서 서울에서 일산 정도의 거리를 비가 퍼붓는 도로를 따라 어찌어찌 갔다 왔습니다. 친구들은 그 이후 알았습니다. 제가 초보, 아니 운전을 그날 처음했다는 사실을요. 그 이후부터 자신감이 붙은 저는 기분이 좋아도, 울적해도 직접 운전을 해 드라이브를 하는 게 기분을 리셋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바로 스물 일곱 때였습니다. 친구 셋이 약속을 했습니다. 드라이브는 가고 싶은 데 운전에는 자신이 없다고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 친구는 운전면허증을 따자 마자 빨간 소형차를 샀던 겁니다. 그때 저는 차는 없지만 면허증은 몇 년째 가지고 다닐 때였습니다. 자취를 하고 있던 저는 '교외로 드라이브'라는 말에 그냥 제가 운전을 하겠다고 나섰던 겁니다.
그날 이후 지금껏 25년 넘게 무사고 운전 중입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사고를 내거나 입을 뻔한 경우는 여러 번입니다. 제 입장에서만 봐도 그때보다 운전을 하면서 크게 변한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속도'!. 분명히 십 년 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습니다. 제가 25년 넘는 시간 동안 도로 위에서 위험했던 상황은 오직 이 한 가지가 원인의 전부였습니다.
빨라진 것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 최고 속도 120km인 도로가 처음으로 생겼고, 설계속도(도로 설계 단계에서 정해지는 속도로, 실제 차량 운행 가능 속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가 140km인 도로로 있습니다. 도로가 좋아지고, 자동차가 좋아졌으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빨라지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전혀 내부가 보이지 않는 진한 '썬팅'입니다. 도무지 운전자의 상황이나 의도를 알 길이 없습니다. 방향지시등을 '깜빡'하거나 일부러 켜지 않는 경우는 너무 흔하니까요. 밴쿠버에 머물 때였습니다. 신호등의 옆 또는 아래에 "LEFT TURN SIGNAL"이라고 쓴 TAB 이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좌회전 전용 신호였습니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는 차가 없는데도, 누구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진 이유 중 하나는 운전자들이 수시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바디랭귀지로 의사를 나누는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묻습니다. 먼저 가라고 웃으면서 손짓, 눈짓합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운전석과 조수석 창은 썬팅 자체를 법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그제야 도로에 줄지어 주차된 차들이 모두 2열 뒤쪽으로만 유리에 옅은 검은색 썬팅들이 되어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인의 안전이, 생명이 사생활 보호보다 우선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엄격했었는데 어느 순간 운전 규칙처럼 자리 잡은 습관이죠. 바로 교차로에서 '꼬리물기'. 이제는 거의 다들 교차로에서 바로 출발하지 않는, 아주 좋은 운전 습관을 가지게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꼬리물기를 하는 차량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속도로 달려들어야 그 신호를 지나칠 수 있죠. 처음부터 멈출 생각이 없는 차들이니까요.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하신다면 다들 한두 번 그런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저 역시 정말 아찔하게 위험했던 상황이 여러 번입니다. 어쩌면 새벽마다 만끽하는 자기애, 자기 효능감, 희망, 연대, 평화 등의 감각들을 고스란히 만끽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지기까지 한 기억도 있거든요.
미세먼지가 심했던 작년 봄 어느 날 퇴근을 할 때였습니다. 2차선 서너 번째 뒤에서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호가 들어왔고 습관처럼 좌우를 살폈습니다. 앞 차들이 순서대로 튀어 나가듯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왼쪽 발바닥으로 하나, 둘, 셋 하면서 박자까지 맞추면서 기다렸습니다. 이쯤 되면 뒤차가 빵빵거릴 시간입니다. 하지만 뒤차는 기다려줬습니다.
막 앞으로 나가려고 하려는 순간. 오른쪽 백미러에 검은색 승용차가 3차선에서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습니다. 신호가 바뀐 지 몇 초나 지났고, 2차선 앞에 있던 차들은 다 직진해서 교차로를 넘어갔습니다. 달려오던 그 차는 3차 선위에 있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시간적으로 저와 함께 나란히 직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그렇게 안심하고 달려 나가려는데 그 검은색 승용차가 갑자기 제 앞으로 허리 꺾인 개구리처럼 뛰어들었습니다. 3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하는 것이었죠. 방향 지시등은 켜지 않았고, 직진 신호는 정지 신호로 막 바뀌고 있었습니다. 급정거를 했습니다. 차 밑바닥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까부터 기다려 준 뒤차도 급정거를 했고요.
교차로 위에 저와 뒤차는 갇힌 채, 검은 승용차는 왼쪽 도로로 진입해 언덕 너머 사라졌습니다. 직진 신호도 사라졌고요. 다행히 오른쪽 도로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앞 줄 차들이 잠깐 멈춰서 줘 교차로를 빠져나올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 빠르게 뛰던 얕은 숨소리에 미슥거렸던 기분은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꽤나 큰 사고였죠.
무슨 일이건 사고가 나지 않아 다행이다, 이번에는 잘 넘어갔다, 살았다 하는 게 그다음 문제의 원인이 되는 법이니까요. 해결하지 않은 채 넘어가 버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습관이 되는 법이니까요. 관념화되는 것이죠. 그 후 한참 동안 운전이 불편해졌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호다에 미흐, 크라스 티비'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
그날 이후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류시화)>를 읽을 때 메모해 두었던 문구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100년을 산다 한 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 여행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그 여행이 훨씬 더 짧아질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싶어 지더군요. 오늘도 살아서 다행이다, 라면서 운전을 멈추는 그날까지 지낼 수는 없는 거니까요.
살다 보면 제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이들이 남습니다. 내가 부지런한 만큼 그런 사람들 위주로 만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나에게도 인사를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말이 적은 사람은 말 많은 사람옆에 있으면 불편합니다.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신중한 사람에게 더 믿음을 가지지요.
스스로의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책은 단순했습니다. 제가 속도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느리게 달리다 보니 느리게 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더군요. 이렇게 안전하게, 여유 있게 세상을 향유하는구나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자 친구였던 아내와 뚜벅이 시절에 한적한 가을 도로를 걷고 있을 때 우리를 태워주셨던 노부부도 그렇게 느릿하게 달리다 우리를 발견했을 겁니다.
한 시간 가까이 막히는 도로 위에서 우리 둘이 발견한 건 노부부의 '모든 속도'였습니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 사이사이에서 노신사는 핸들도 천천히 돌렸고, 두 분이 나누시는 대화도 느릿했고, 자주 눈빛을 한참 동안 맞추셨습니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뒷자리에 앉아 있던 게 엊그제처럼 생생합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그 장면을 위해 지어진 듯 말입니다.
그 후 출퇴근할 때 이용하는 일반 국도에서는 60~70km, 고속도로에서는 80-90km의 속도로 운전을 한 지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2차선, 3차선에서 천천히 달리고 있죠. '빨리 달리지 말고, 차선을 자주 바꾸지 말고, 조금 일찍 출발'이라는 평범한 기준을 묵묵히 지키려고 애씁니다. 신호등이 정지 신호로 바뀌려고 하면 미리 서려고 합니다. 남을 다치게도 말고, 내가 다치지도 말아야 하니까요.
그런데요.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2차선에서 달리는데도 경적을 울립니다. 라이트 상향 등을 번쩍이는 운전자도 있습니다. 1차선으로 넘어 지나면서 꼭 들여다보며 랩을 하는 이들까지도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속도대로 삽니다만 내 상태가 나쁜 날에는 마음까지 나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작년 11월 며칠 이후니까 석 달이 되어 갑니다. 25년 전 첫 운전 때도 붙이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고백하지 않았던 '초보 운전'을 다시 붙이고 다니기 시작한 게 말입니다. 처음인 이번 생에 사는 게 진짜 초보인 사실을 이제는 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느끼는 지라 이참에 더욱!
인간이 문화를 바탕으로 이성을 발휘하여 자연을 극복하고 발전된 사회를 건설한 게 문명사회이죠. 자동차는 그런 문명사회가 되면서 인간이 발명해 낸 아주 유용하고, 의미 있는 탈것의 대표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삶의 요소들이 집집마다 생긴 자동차의 덕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이 우리는 그렇게 표면적으로 문명인이 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겉은 그럴지 몰라도 속은 점점 '야만성'이 자라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개하고, 뒤떨어졌다고 스스로 멀리하면서 파괴해 왔던 인간이 잘 만든 '도구'들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말해 뭐 합니까. 누구나 정해진 틀속에서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유지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야만성은 서로의 자유를 흔들려고 하는 겁니다. 내 자유만 지켜지면 된다, 는 생각을 평소에는 안 하더라도, '빠른 도구'위에만 올라타면, 아늑한 사적의 공간에 머물게 되면 본능처럼 솟구치게 자극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겁니다.
윌리엄 진서가 이야기한 '인간미와 온기'를 더욱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자가운전만큼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영역이 일정 시간 동안 밀접하게 연결된 인간의 행위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상상을 할 수도 없던 경험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시, 그 본성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속도, 말로 내뱉는 속도, 판단하는 속도를 늦추면서요. 평소의 삶 속에 녹아 있는 나만의 속도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당장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속도감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에는 누적된 값이 곧바로 타인의 자유는 물론 삶 자체를 위협하게 됩니다.
속도를 늦추면, 미리 멈추면 사람이 보입니다. 인간미와 온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운전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적절한 속도로 자기 방향을 일정하게 잡습니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습니다. 자주 바꾸지도 않지만, 방향 전환도 여유롭고 허용적입니다. 소리도 빛도 발산하지 않죠. 자신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허용합니다. 가벼운 눈짓과 손짓으로 먼저 가라, 고맙다 연신 타인과의 소통에 집중합니다.
아마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손가락을 핸들에 튕기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순간의 행복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표정의 운전자들입니다. 그들을 보면 인간미가 느껴집니다. 당장 따라 배워야지 다짐하게 만듭니다. 절로 고개를 숙이고, 눈웃음을 짓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됩니다. 진짜 문명인이 지닌 수많은 아름다움 중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은 그런 운전미입니다.
인간에게서 느낄 수 있는 품격이 그렇듯이 운전의 품격 역시 비싸고 멋지고 튼튼하고 새까 많게 가려진 자동차에서만 풍기지는 않으니까요. 운전미는 우리가 운전대를 놓을 수밖에 없을 때까지 잃지 말아야 할 안전한 아름다움입니다. 누구나 다치지도 않고, 다치게도 하지 않으면서 나이 먹고 싶은 것이니까요.
오늘도 제 속도로, 제 방향으로 천천히 출발합니다!
도로에서 만나요.
오늘도 안전 운전미 하세요!!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토(외출전 발행) : 아빠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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