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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희 Dec 05. 2023

아픔, 그 고통의 씨앗

마음이 아플 때면 잠시 멈춰 서고 싶다. 모든 게 잠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아픔이 찾아오면 잘 가지 않던 시간도 나를 재촉하듯 해야 할 일들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며 마음을 급하게 한다. 이대로는 할 수 없다고 어린아이처럼 외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내가 책임져야 할 아기가 있고 그 아기를 위한 일정이 있기에 나는 그 아픔을 마음에 가둔 채 잠시 기다리라는 말로 스스로에게 위안을 하고 우선 일을 한다. 그랬더니 그 아픔은 씨앗이 되어버렸다. 고통의 씨앗 말이다. 아픔은 자생 능력이 없나 보다. 상처는 치유되어야만 하나보다. 홀로 놔두면 괜찮아지질 않나 보다. 결국 견디다 못해 내 마음을 뚫고 이 세상에 나와 어떻게든 그 고통을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나는, 그 아픔을 고통의 씨앗이라 부른다.


얼마 전, 마음이 답답해 아기가 낮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 오래간만에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려하는데 무심코 바라본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답답한 내 마음에 흩트려져 내리는 눈송이들이 앉았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그 눈발에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만약 내가 불쑥 찾아온 불평불만들에 속이 상한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기 옆에서 잠만 잤더라면, 이렇게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놓칠 뻔했다. 잠시 잠깐 내렸던 그 눈발 위로 나는 지나간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고 내 마음속 상처들을 마주해 보았다. 잘 이겨내오며 살아왔기에 내 상처들은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굳은살이 되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뿐 상처 자국은 남아 있었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예방, 새로운 상처가 생기는 것을 내가 모두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미 겪은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무언가는 할 수 있기에, 문득 나는 내가 좀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내 집을 짓기 위해선 나 자신이 현명한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 좋은 터 위에 좋은 재료로 집을 짓는 것은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균형 있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완성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다루는 것은 건축가가 해야 할 몫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 고통스러울 때면 파괴본능이 일어나는 것 같다. 너무나 아플 땐 이전의 쌓아왔던 모든 것이 마치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울부짖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거짓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아픔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인내해야 한다. 사람을, 환경을, 상황을 인내해야 함이 아니라 바로 '나를 포기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 속에는 지혜가 숨어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인내할 때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인내해야만이 보이는 성숙한 혜안으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


때때로 아픔이 밀려와 뒤척이는 그 밤마다 사실 나도 간절히 소원한다. 부디 따뜻한 세상이 오기를, 좋은 소식들만 들려오기를, 주변에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아픔 속에서 벗어나기를, 크고 작은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도하며 희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그 새벽을 수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 희망들이 너무나 부풀어 커지면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 그 꿈마저 거짓으로 물들어 버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꿈이 문제인지 그 꿈을 꾸는 내가 문제인지 '꿈마저 소원하지 못하나' 실망을 하려던 찰나에 나는 내가 좀 더 현명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순간에 왜 현명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지  말이다. 문득 성공한 사람들의 영예로운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느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볼 때면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서기까지의 그 노고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그 가운데 존재했던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감내하는 인내 앞에는 어떠한 말로 응원과 칭찬을 하기보다 그저 묵묵하게 박수를 쳐주는 것이 숭고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가 내가 서야 할 자리인지 내가 바라봐야 할 정상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 같지만, 사실 그럼에도 괜찮지 않나 생각한다. 내가 고통과 아픔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앞으로의 성공적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오늘 하루 감사함으로 이 기쁨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가족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내 심장에 만족하는 기쁨이 있기에 나는 다 좋다. 언뜻 '실패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처가 되었는지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실패자가 아니다. 성공자도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어떻게 평가되는지 상관이 없는, 그럼에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현명해지고 싶다. 고통을 이기는 순간은, 생각보다 이성적이고 현명하게 앞을 내다볼 때 넉넉히 찾아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성장한다. 굴하지 않고 나를 잃지 않고 전진해야만이 어제보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러다 보면 그 고통의 씨앗숨을 죽이고, 새로운 희망의 씨앗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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