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준비된 마음에 머문다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11월의 끝자락, 유난히 고요한 아침.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풍으로 물들어 있던 덤불숲은 하룻밤 사이 폭설에 묻혔고,
길 건너 붉은 아치 다리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첫눈이라 반가웠지만, 예상치 못한 폭설에 당황스러움마저 느껴졌습니다.
급히 주차장으로 내려가 제설을 마친 뒤,
돌아와 꽁꽁 언 손을 뜨거운 보리차 잔으로 녹이며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내리는 눈발과 그 사이로 퍼지는 보리차 향기 속에서,
문득 선명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해질 무렵이면 찾아오던 단골 커플이 있었지요.
어느 날, 남성분이 얼굴을 붉히며 꽃다발과 선물이 담긴 종이 백을 내밀었습니다.
“오늘 프러포즈하려고요. 좀 도와주세요.”
동석자와 이야기하던 중,
바 쪽을 바라보던 그의 신호에 맞춰 꽃다발과 선물을 건넸습니다.
머무는 내내 화기애애했던 두 사람은 환한 얼굴로 카페를 나섰지요.
그로부터 몇 달 뒤, 발길이 없던 그가 다시 카페를 찾았습니다.
잔뜩 움츠린 어깨, 비스듬히 내린 시선, 어두워진 얼굴로...
그는 멈칫거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첫 결혼이 깨지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이었어요.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취향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계절마다 함께 지역을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요.
...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마음은,
상대에게는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프러포즈 이후, 그는 점점 집착이 심해졌고
잦은 연락과 만남을 요구했습니다.
그에 부담을 느낀 그녀는 점차 연락을 피하다가,
어느 날, 이별을 통보했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랑은 퀵 배송처럼 빠릅니다.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기도 하지요.
허기진 마음으로 시작한 사랑은 아무리 받아도 채워지지 않고,
되레 줄수록 더 기대게 만들며, 결국 먼저 지치고 맙니다.
그러니 먼저, 스스로를 채워야 하지요.
덜 익은 마음으로 시작된 사랑은,
기대한 만큼의 달콤함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익은 마음은
입안 가득 여운을 남기는 열매로 오래도록 기억되곤 하지요.
그렇게 마음이 허기진 채 연애를 반복하며 상처를 입은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영업을 하던 멋진 여성 손님이었는데,
어느 날 조용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타로 좀 봐주시면 안 돼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힘이 빠져 보이던 눈빛이 마음에 걸려,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별 직후, 새로운 만남이 궁금했던 그녀와 함께 타로를 열어보았습니다.
"혹시… 이전 이별들에서도 금전적인 손해를 보신 적 있으세요? “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긴 했는데...”
겉보기와 달리, 그녀는 외로울 때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그들은 늘 그녀의 지갑에 기대곤 했다고 합니다.
관계는 지갑이 열려 있는 동안만 이어졌고,
매번 상처로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사랑이라 믿었던 시간은
어쩌면 외로움의 값을 지불하며 얻은 짧은 위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허기진 상태에서는
결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함께 확인하고
진짜 사랑을 맞이하기 위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도대체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요.
허기를 채우기 위한 관계는 아마도 사랑이라 부르기 어려울 테지요.
진짜 사랑은,
이미 채워진 마음을 티 없이 건네는 데서 시작됩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마음조차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존중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먼저 말하려 들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판단 없이 귀 기울입니다.
그 귀 기울임은 단순한 경청이 아니라,
기도처럼 온 마음을 다한 집중이며,
말 없는 헌신이자 깊은 존중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깨지기 쉬운 약속보다
깊고 성실한 일상에서 증명됩니다.
마주 보는 눈빛,
다정한 말투,
여유가 느껴지는 기다림.
그 일관된 따뜻함이야말로
말보다 진한 사랑의 몸짓 언어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랑은
늘 확인받고 싶어 하며 조급해집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금세 서운해지고
마음은 그만큼 빨리 식어버립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전함을 메우려는 감정의 거래에 가깝습니다.
진짜 사랑은 그렇게 오고 가지 않습니다.
함께 익어가길 기다리는 마음,
상대를 있는 그대로 품어 안는 태도,
그 안에서 사랑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너무 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아이들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리 오래 헤매지 않기를.
첫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습니다.
창밖으로,
두 연인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서툰 몸짓, 조심스러운 발걸음.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지금은 참 예쁘게만 보입니다.
사랑이 눈이 되어,
소리 없이 대지 위로 내려앉습니다.
첫눈도, 폭설도…
사랑이라서,
다 좋습니다.
사랑을 준비하는 너에게
아들아.
너도 엄마처럼, 서툰 사랑을 해본 적 있니?
엄마는 이제야, 사랑이란 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구나.
처음엔 누구나 비슷하대.
눈이 부시도록 좋아 보이고,
뭐든 함께하고 싶고,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문득 달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곤 해.
그 사람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변한 걸까.
많은 이들이 결국 이렇게 말하지.
“넌 변했어”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어.
어쩌면,
아직 나 자신을 잘 몰랐기 때문일지도 몰라.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더구나.
사랑은,
나를 아는 데서 시작된단다.
내 마음을 잘 알아야,
상대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사랑은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야.
마법 같은 끌림은 우리를 자주 속이지.
그 끌림은 어쩌면 네 안의 결핍이 만든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몰라.
그러니 사랑을 시작하기 전,
먼저 네 안을 돌아보렴.
마주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외면하지 말고,
조금씩 채워가 보는 거야.
그 시간이 쌓일수록,
너는 한결 단단해지고
누군가를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마음이 익어갈수록,
그에 어울리는 인연도 자연스레 네 곁으로 다가올 거란다.
억지로 끌어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닿을 준비가 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거지.
아들아,
너만의 빛을 내는 태양이 되렴.
태양은 스스로 빛나면서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잖니.
그 빛을 기다리는 행성은 달아나지 않아.
반드시 제자리에 머물게 되어 있어.
그러니 인연이 다가오면,
그 존재를 조건 없이 비춰주렴.
그 사람이 자기답게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지금 네 마음엔 어떤 것들로 채워지고 있니?
무엇이든 괜찮단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너만의 속도로 천천히 익어가면 돼.
엄마는 언제나, 너를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