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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Dec 27. 2020

둥글게 둥글게

맞바람이 비행기를 띄우는 법

"조선 500년사 3명의 명재상 중 한 사람인 맹사성은 겸양지덕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는 자신보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의 예를 갖추고 반드시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았다고 한다. 손님이 오면 맨 윗자리에 앉혔으며 돌아갈 때에는 공손하게 문 밖까지 배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겸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서울신문 202012.09>


"겸손하게 살라"는 말을 요즘처럼 천시한 적이 있었을까. 저마다 셀프 홍보와 개인의 커리어를 내세워야 그나마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겸손은) 씨가 말라 조만간 자취까지 감추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경쟁이 낳은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행여 ‘겸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던 맹사성이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도량과 인품을 따지기 전에 자기 앞가름도 못한다며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겸손이 품위로 등치되는 삶은 요즘 세상에 불가능한 것일까.  


주위에 겸손으로 무장한 둥글둥글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속이 참 깊다'고 경탄하면서도, '악다구니가 넘쳐나는 세상에 제대로 밥이나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게 된다. 불쾌하거나 짜증 난 일에도 흔쾌히 미소와 웃음으로 넘기는 이들을 보면, 반응은 대개 두 부류다. 배알도 없느냐는 힐난파와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인정파.  


나는 후자다. 경험으로 비춰볼 때 대개 그런 사람은 삶의 내공이 깊다는 것을 직감한다. ‘둥글게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의 모난 부분을 정으로 수없이 깎아냈음을 말이다. 그런 혹독한 인고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그런 둥근 모습이 나온다는 것을. 마치 바닷가 몽돌이 뭍으로 몰려오는 파도의 성난 기세에 맞서 온몸으로 부딪친 후에야 동글동글한 돌멩이가 되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둥근 삶’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하루에도 시도 때도 없이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불편한 감정과 마주하노라면, 그런 득도의 경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인생의 변수와 리스크가 일상화되고 있는 요즘, 그런 겸손의 미덕을 토대로 둥글둥글한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원과 대리 시절 곧잘 ‘가시’ 같다는 말을 들었다. 불편을 야기하는 상황에 참지 못하고 발끈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소화할 수 있는 한계치를 벗어난 상황에서는 상사에게 꼿꼿이 목울대를 세우기도 했다. 주홍글씨가 된 표식은 한동안 회사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다.  


누구나 인생의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왜 하필 이런 시련이 내게 닥쳤냐며 한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불만과 실망의 감정에 묶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던 경험은 누구나 겪었을 터. 그러던 차에, [프레임] (최인철 저)이란 책을 읽고 주옥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프레임은 결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설계의 대상이다. 프레임 개선 작업은 나의 언어와 은유, 가정과 전제, 단어와 질문, 경험과 맥락 등을 점검한 후에 더 나은 것으로 설계하고 시공하는 작업을 요한다.
-프레임 中-


누구나 달의 단면만 보듯이, 나 역시 주어진 환경을 평면으로 재단하는 프레임의 오류를 저질렀다. 최인철 교수가 말했듯이, 삶의 프레임을 ‘설계의 대상’으로 보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단면이 아닌 이면으로, 평면이 아닌 입체로 언제든지 내 삶의 프레임을 리셋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을 설계와 시공의 대상으로 프레임을 조정한다면 얼마든지 시련을 꿋꿋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바람이 비행기를 띄우듯이, 혹독한 시련은 내 삶의 중요한 트리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가 지닌 이면의 프레임을 입체적으로 들여다 보면서 목울대를 세우는 일은 현저하게 줄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성난 파도와 예리한 정이 내면의 가시를 뭉툭하게 만들면서, 지금은 그러려니 하며 각진 삶보다는 둥근 삶을 응원하는 편이다.


특정 패러다임이나 주장에 동조하기보다는 균형점을 찾으려고 모색한다. 편을 확실히 하지 않는다는 좌고우면의 핀잔이 날아올지라도, 나는 그런 드잡이식의  가르기는 멀리한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고,  배울 점만 취사선택해서 내공에 덧댄다면 이런 둥글둥글한 역량이 나를 한층  단단하게 만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겸손이 무기가 되어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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